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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희 Sep 24. 2021

그 산이 그 산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후회와 자괴감의 통돌이 세탁기 속 빨래 같았던 2003년 10월 29일

인생에는 희로애락 애오욕이 있다고 한다. 

당신의 인생에도 내 인생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거리는 앞면을 보다가 동전을 든 손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바로 어두운 뒷면이 나타나는 것처럼 희와 노, 락과 애는 동전의 양면인 듯 붙어있는 것이다.  성취감을 최고조로 느끼고 마치 스포츠 경기 같았던 박람회는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동료들과 전우애 넘치는 현장은 활력이 넘쳤다.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심지어 나는 첫 웨딩박람회에서 계약을 제일 많이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실적 발표를 할 때 아주 잠깐 내가 일 좀 하는 웨딩플래너인가 보다 으쓱도 했었다. 운명의 대마왕이라도 내려다보고 있는지 나의 그런 이유 없는 으쓱함의 싹을 잘라버리는 사건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 그때는 같은 이름의 웨딩홀들이 꽤 있었다. 강남에 인기 많은 웨딩홀이 생기면 그 이름 따서 동명의 웨딩홀이 도시마다 생기곤 했으니까.  그런 곳 중 하나가 ‘웨딩의 전당’이었는데 그 당시 인기가 어마어마했던 곳이다. 수원에도 광주에도 상봉동에도 광진구에도 은평구에도 웨딩의 전당이 있던 시절이다.

      

웨딩의 전당에서 식을 하는 고객의 발주서에 [10월 29일 토요일 1시 웨딩의 전당]이라고 정확히 기재해서 보냈다. 스튜디오 사장님은 결혼식 며칠 전 최종 확인 차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고    

 

“웨딩홀이 웨딩의 전당, 거기 옆에 큰 절 있는 곳 맞으시죠?”

“큰 절이요? 네 맞아요. ”     


그 두 사람, 스튜디오 사장님과 신부는 각자 성실하게 아는 것을 토대로 물었고 답했다. 이 세상천지에 큰 절이 옆에 있는 [웨딩의 전당]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이상한 거지, 큰 절 옆에 있는 웨딩의 전당 맞죠?라고 디테일하게 물은 스튜디오 사장님이


‘봉은사 옆에 있는 웨딩의 전당 맞죠?’라고 묻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사라는 큰 절이요? 네 맞아요"라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했다고 하긴 너무 가혹하다. 당시 이제 겨우 웨딩동에 발 들인 지 1년도 안되던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비슷한 이름이 몇 개 있는 웨딩홀이다 싶을 때는 괄호 치고 (00동)을 꼭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발주서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신랑 신부 이름/ 연락처/ 결혼식 날짜/ 시간/ 웨딩홀 이름]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악몽의 시작이다.   


소름 끼치는 그날 10월 29일, 화창한 가을, 결혼식이 참 많은 토요일 점심.

웨딩홀이 많은 강남구 바로 옆 광진구, 송파구, 강동구 뭐 이런 지역은 토요일 차가 아주 끔찍하게 막히던

시절이다. 요새 차 막히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날 꽃단장한 두 사람을 메이크업 숍에서 완벽 체크하고 만족스럽게 보내드렸다. ‘너무 예쁘세요. 두 분 진짜 잘 어울려요! 오늘 씩씩하게 잘하세요 오오오오’ 함께 사진도 찍고 다 덕분이라는 인사도 들으며 화기애애하고 훈훈하게 인사를 마쳤다. 그분들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뒤에서 오랫동안 보고 사무실로 복귀하는데 그날 유난히 차가 많이 막혔다.





그리고 1시 결혼식이 시작되기 58분쯤 남았을 때 전화가 왔다. 스튜디오 사장님이었다. 웨딩의 전당에 간 사진작가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 신랑 신부가 없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이냐고 했다. 등골에 땀이 순식간에 누가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쏟아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분명히 있는데 두 분 도착하셨을 텐데요.

-아니에요, 홀 마다 다 뒤져보는데 이름이 같은 분들이 안계신대요.

-네에?? 아니 거긴 단독홀이에요. 홀 마다 라니 무슨 말씀이세요?(이때부터 거의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아직 20대였다.)

-에에? 아니 여기 웨딩의 전당 맞는데, 삼성동 여기 봉은사 옆의

-네 에에?? 아니 거긴 웨딩의 전당, 구의동에 있는 건데요.

-아니? 신부님과 직접 확인 통화도 했는데요?? 큰 절 옆에 있는 거 맞다고 하셨는데

-아... 여기도 영화사라고 큰 절이 근처에 있긴 해요.

(마침 그 영화사가 있는 그 동네에 나는 살고 있어서 신부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알 수 있었다)

....

....


사장님은 사진작가와 통화한다고 전화를 끊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심장이 난리가 났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색이 되어 있기를 1~2분 되었나? 전화가 왔다. 신랑님이었다. 사진작가가 1시간 전부터 촬영이라고 하셨는데 언제쯤 오시는지 좀 물어보려고요, 곧 오실텐데 서둘러서 죄송한데요, 어른들이 재촉하시네요.라고 하셨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모르시는 신랑님은 어디까지 왔는지 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어른들이 흥이 올라서 어서 사진 좀 찍으라고 하신다고.


그 시절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절은 아니었다. 찍을 순 있었겠지만 화질이라는 게 영 아니었다.

그때 싸이월드 쫌 한다는 사람들은 똑딱이 카메라를 따로 들고 다녀야 하는 시절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이 사건이 지금 현재 촌각을 다툰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신랑님께 확인하고 전화드린다 하고 스튜디오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전화가 왔다. 스튜디오 직원 분이었다.


[해결책 IS]

#차가 너무 막혀서 현재 그 웨딩홀에 식전에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최대한 식 시작하는 1시까지는 갈 수 있다. (사실, 삼성동과 구의동은 차만 안 막히면 아주 가깝다.)

#식 전 신부대기실에서 찍는 사진은 웨딩홀 소속 사진기사님께 비용 드리고 찍어달라고 했다고,

#결혼식 시작부터는 작가님 도착해서 촬영하실 수 있다고,


세상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스튜디오 사장님은 그렇게 순식간에 드라마틱하고도 큰 손해 보는 것 없이 일을 처리해주셨다. 요새야 스튜디오도 스타일을 보고 취향에 맞게 고르지만 그때 그분들은 다행히 그 부분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으셨고 양해해주셨다. 웨딩홀 소속 작가님께서 바로 신부대기실과 로비에서 어르신들 사진을 친절하고 능숙하게 잘 촬영해주셨기 때문에 더 빨리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오해가 생긴 이유와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신부대기실에서 찍는 사진과 로비에서 손님맞이하시는 사진 그 부분은 웨딩홀 소속 작가님께서 촬영한 필름(무려 필름 시절 이야기이다)을 받아서 앨범 제작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기겁을 한다거나 식겁을 했다거나 다리에 힘이 풀리고 하늘이 노래지고 하는 감정을 그날 다 느꼈다.

잘난척하면서 당신의 결혼 준비를 아주 멋들어지게 해 드리겠노라 큰소리쳤던 내가 부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막 울고 싶다가 막 욕을 쏟아내고 싶다가 소리를 치고 싶다가 그냥 다 관두고 싶다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후회와 자괴감의 통돌이 세탁기 속 빨래가 되어서 이리저리 후 두러 쳐지고 매쳐지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났을 때 이미 너덜너덜해질 때로 너덜너덜해진 나는 신랑 신부님께 만 번, 스튜디오 사장님께 만 번,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사죄드리고 나서 해가 질 때쯤 동네 절친을 불러서 그 앞에서 얼마나 울고불고했는지 모른다.(이 동네라는 게 그 큰 절 ‘영화사’ 옆에 있다는 웨딩의 전당 근처 치킨집이었다.) 그때 당시에 좋은 분위기로 만나고 있던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로가 간절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고 안타깝다며 못 나온다고 했던 그놈 때문에도 서러움이 극에 달한 거 같다. 그때 결혼사진을 날릴 뻔했던 커플은 컴플레인을 하면서도      

신랑 왈 : “여자 친구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세요? 여자 친구가 기대가 컸는데, 난 괜찮아요!”

신부 왈 : “아니, 우리 남자 친구가 계속 전화하고 그러느라고 진짜 걱정 많이 했단 말이에요.      


그 두 사람에겐 그렇게 서로가 든든하게 있고 스튜디오 사장님은 경력과 경륜과 여유가 있고

나는 경력도 없고 답도 없고 위로해 줄 남자 친구도 없고 자존감도 없고 그렇게 무너지는 밤이었다.

친구 앞에서 진상처럼 징징대다가 집에 가서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내가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거구나 깨달았다.

아무리 작은 실수도 작은 실수로 남지 못하는 일, 평생 단 한번, 살면서 최초로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모아서 주인공이 되는 행사, 결혼식 준비는 그렇게 어렵고 완벽해야 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날 밤, 한 20년쯤 지나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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