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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Apr 17. 2016

그녀의 '덫' #20

당신이 그리는 그 세상에, 내가 있나요?

흔들림 없이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경과 대조되어 필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약혼? 언제?"


날 빤히 쳐다보는 필상.

그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날 대신해 무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곧 할 겁니다. 우리 진지하게 사귀고 있습니다. 그쪽이야말로 무슨 일이시죠?"


당황한 표정을 짓는 필상.


"아...... 잠시 예랑이랑 할 말이 있어요."

"그럼, 여기서 하시죠. 제가 같이 들어도 괜찮을 말이겠죠?"


한 숨을 내쉬는 필상. 그의 떨리는 표정을 보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우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한 때 좋은 사이였는데,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리고 그때, 필상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 '정연'

천천히 핸드폰을 귀에 대는 필상.


"응, 길이 엇갈렸나 봐. 알았어. 금방 갈게."


정연이가 있었지. 그의 곁에 정연이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또 착각할 뻔했어.

그런 내 손을 더 꽉 잡아주는 무경.

그의 손이 참 따뜻하다.

그래, 내 옆에는 무경이 있구나. 이렇게 듬직하게 단단한 모습으로 날 지키듯 함께 있어주는 이 사람이 이젠 내 옆에 있어. 흔들리지 말아야지. 이 사람을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가 볼게. 잘 지내고,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필상이 눈빛을 감추며 인사를 건넨다.

그에 화답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그런 내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기 전, 무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무경 역시 예의를 갖춰 목례를 하며 그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각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소개를 마친 무경이 집에 돌아가자며 날 이끌어냈다.

그 모습에 쪼르르 다가온 시창.


"벌써 가? 더 놀다 가지, 뭐가 그리 급해?"

"좀 피곤해서. 예랑씨도 마찬가지고."

"왜왜왜? 뭔 일 있어? 둘 다 표정이 장난 아닌데?"

"간다. 나중에 보자."


무뚝뚝하게 무경이 연회장 밖으로 향했고, 나 역시 그의 옆에서 함께 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무경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그때, 그 사람 아니야? 예랑씨 집에 데려다주었던......"

"응...... 맞아."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내가 끼어든 건데, 뭔가 심각해 보였거든. 자기 찾으러 나왔다가 같이 있는 거 보고, 별 일없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한 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나타나 줘서 고마웠어."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다행이고. 괜찮은 거지?"

"응. 그런데 그것보다 자기가 약혼 얘기를 해서 더 당황했었어."

"아, 그거. 그건 빈 말 아니었는데."

"뭐?"

"난 진지하게 자기 만나고 있고, 언젠가는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긴 아니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됐고, 또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런데, 무경씨가 불쑥 그런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랐어."


날 쳐다보는 무경.


"그럼 자기는 앞으로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런 뜻이야?"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기가 너무 확고하게 얘기를 하니까 좀 당황했다는 거지."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나 방금 상처받은 것 같아."


그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그의 얼굴이 도심의 불빛을 받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긴, 날 왜 만나?"

"왜 긴...... 좋으니까."

"그럼, 나중에 내가 싫어지면 떠나는 건가?"

"그건......"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변명을 하려는데,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자기가 그리는 그 세상에, 내가 있어?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날 기다리던 그가


"아직 아니구나......"






잠시 후, 그의 차가 하나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는 무경의 표정이 어둡다.

그런 그를 보는 내 마음 역시 바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난, 손을 흔들며 먼저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예랑씨."


그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가 다가와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 입술.

그가 얼굴을 들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이며


"내가 더 잘할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기도 알아줄 거야. 맞지?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날 받아줘. 그리고, 아직 이 말을 못했는데,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라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리면서 눈가가 촉촉해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날 바라봐 주는 이 남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감정이 북받쳐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잘 가'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 천천히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에게 이렇게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건가?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게, 꿈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또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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