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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Apr 20. 2016

그녀의 '덫' #21

'절망'과 '시련'

새벽 공기가 차가웁다.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4시 13분,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홍제천을 따라 하천변에 조성된 산책로를  뛰기 시작했다.


이제 곧 11월이다.

기나긴 여름과 짧았던 가을이 지나고, 다시 긴 겨울이 다가온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게 되는데, 최근에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푸른빛을 잃어가는 나무와 잿빛 하늘 속으로 점점 여명이 밝아지고 있다.

수많은 잡념과 생각들.

나도 모르게 지나쳐 가는 것들.

내가 알 수 없는 세상 밖의 일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맡으며 달리는 것이다.

아직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역시 비슷하겠지.

언젠가 그 길을 멈추게 된다면, 그건 내가 원해서일까,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일까......








땀방울을 흘리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전에 살던 연남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좁은 주택가의 골목을 돌고 돌아 발걸음이 멈춘 곳은, 무경의 집 앞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거친 호흡과 함께 그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있는 곳......

한 걸음만 다가서면 그를 만날 수 있는 거리.

그런데, 그 한 걸음을 다가설 수가 없다. 이건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열등감은 나의 문제이자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의 모든 것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느새, 꽉 다 입술이 아려온다.


기다려줄래요? 내가 자아를 찾을 때까지....... 내 스스로 나의 길을 찾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어줄래요?


한동안 그의 집을 올려보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홍제동으로 향했다.

어느덧 아침 햇살이 환하게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달리기에 좋은 날이다. 적당히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달릴 수 있는 그런 아침.





며칠 후, 무경이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출판사와의 몇 달만에 미팅이라 체류기간이 한 달 이상 걸릴 거라고 했다.

그를 만난 이후, 그 정도로 떨어져 있던 적이 없어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공항에서 그를 배웅하면서 떠나는 그에게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요가 자격증 시험 전 날,

하나는 센터 선생님들과 회식자리가 늦어진다는 기별을 주었고, 난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살짝 잠이 들었을까.

피곤함에 지쳐 몸은 노곤하고, 무의식의 상태로 나락에 젖어드는 경계에서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다가오는 발소리에 온 몸이 뻣뻣해져 갔고, 동공이 풀려 방 안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다.

'그 남자다!!!'

직감적으로 악몽 속의 검은 눈의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나에게 다가온다.

이미 몸이 굳어져 있고, 온 힘을 다해 깨어나려 애를 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를 둘러싼 기운이 방 안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하고, 난 의식을 잃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내려보았을 때, 그를 쏘아보고 있는 날 보자마자, 그가 '움찔'하며 한 발작 뒤로 물러선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도망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의 세포를 하나씩 일깨우고 있었다.

'지면 안돼. 정신 차려야 해. 정신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말을 꺼낸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듯이.


"  , . 왜 두려워하지 않지? 내가 누군지 아나?"


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희미한 웃음이 어둠 속에 흐르고 있다.


"내 이름은 '절망'이야. 난 나이기도 하지만, 네가 만들어낸 또 다른 너의 모습이기도 하지. 넌 항상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깨어난  건가?"

"원하는 게 뭐예요?"


그가 간헐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말했잖아. 난 네가 만들어낸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널 지켜봤어. 그리고, 네가 깨닫기를 기다려왔지. 하지만 넌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항상 두려움에 갇혀있었어. 그런 네가 날 불러낸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필요 없는 건가?"

"난 한 번도 당신을 원한 적이 없어요.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너의 나약함이 날 만들어낸 거야. 그래, 지금은 너의 의지가 날 이겼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곧 다른 누군가 널 찾아올 거야. 그는 나보다 훨씬 집요하고 강해서, 이 정도로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그의 이름은 '시련'이야. 기억해둬."

"난 당신도 그리고 그 어떤 누구도 두렵지 않아."


클클거리는 그의 웃음소리. 그는 사슬을 끌며 문으로 몸을 돌렸고, 방을 떠나기 전 뒤돌아보며


"난 한 번도 널 막은 적이 없어. 이 모든 것이 네가 만들어낸 거라고. 이제부턴 네가 '시련'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지켜보지."


그가 방 안에서 사라지고 난 후, 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짧은 꿈을 꾸었다.

어떤 한적한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그 앞으로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평온한 표정을 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새벽 늦게 들어온 하나는 아직 술이 안 깨 잠에 취해있었고, 난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준비를 마치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다.

예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린 후,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준비했던 동작들을 모두 꺼내었다.

몸을 움직일수록, 시작하기 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익숙한 몸놀림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공을 들여 마지막 동작까지 마치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인사를 올린 후, 다시 대기실로 향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무경의 문자메시지가 와 있다.

'오늘 테스트지? 힘내. 사랑해. 보고 싶어'

그의 메시지를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는 길.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는 맑고, 발걸음이 가벼운 이 느낌이 좋다.


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무경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보고 싶어'

그렇게 화창한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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