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이 체력을 회복한 후, 다시 출근을 하면서, 나 역시 하나의 집으로 돌아 와 센터에서 하루하루의 업무와 함께, 요가 연습에 매진하였다.
자격증 시험이 다시 한 달 뒤로 다가왔다.
또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싶어 미루고 싶다가도, 자꾸 이렇게 뒤로 물러선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하나하나 얽힌 매듭을 풀다 보면 언젠가 그 끝이 보이겠지.
그리고, 그 끝이 또 다른 시작점이 될 수도 있겠지......
아팠던 그 날 이후, 무경은 혹시라도 내가 또 연락이 안 돼 불안해할까 봐 하루에도 수시로 먼저 연락을 해주었다.
출근하기 전 차 안에서, 점심 후 잠깐의 휴식을 취할 때, 퇴근하기 전 사무실에서, 퇴근길 또 차 안에서, 집에 도착해서, 잠들기 전에도......
비록 일정이 바빠 전화를 하자마자 끊어야 하는 상황이 잦았지만, 그래도 그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늦은 밤 하나와 최근 개봉한 영화 얘기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극장에 가게 되었는데, 무경이 자고 있을까 봐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켜 놓고 영화를 보고 나니, 그동안에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넘었다.
'무슨 일 있는 건지 걱정되니 연락 줄래?'라는 문자 메시지와 함께.
극장을 나서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안 되고, 바로 음성메시지로 넘어간다.
새벽이 다 되어 동네 앞에서 하나와 함께 택시에서 내렸는데, 집 앞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가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달려가 그를 불렀는데, 내 부름에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앞으로 다가온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걱정했어. 보고 싶었고......"
"아......"
"또 그러지 마. 내가 불안해서 힘드니까."
"응, 안 그럴게. 미안해."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하나는 '슬금슬금'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가로등 불이 켜진 집 앞 골목에서 한동안 나를 그렇게 보듬으며 안아주었다.
며칠 후, 무경과 통화를 하다가, 그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다음 주에 문체부에서 주최하는 문화 후원회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갈래?"
"응? 파티?"
"응. 매년마다 미술, 음악, 무용, 출판, 방송, 영화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을 초청해서 진흥 관련 후원사업을 소개하는 자리거든. 난 가야 할 것 같아서. 자기도 시간 맞으면 같이 가자."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 괜찮을까?"
"괜찮아.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그 날 영화인 대표로 시창이도 올 거야."
"아 정말? 재밌겠다."
"그 자식, 공식석상에서는 아마 평소와는 다를 걸. 아무튼 자기도 스케줄 확인해보고 가능하면 같이 가줘. 혼자 가면 좀 그래서. 작년에도 연설만 듣고 나왔거든."
"응, 알겠어요. 그럼."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동안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센터에 신입회원이 늘다 보니 업무량이 많아져서 무경의 연락을 제 때 받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당일이 되어 GX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계속 울려 받았더니, 시창이었다.
"예랑씨 오늘 파티 갈 거지?"
"아....... 오늘이었어요?"
"응. 형한테 들었지? 저녁 7신데 나랑 같이 준비하고 가자. 일 언제 끝나?"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
"아직 시간이 안 돼서. 저 6시 퇴근이에요."
"그럼 준비할 시간이 안 되는데, 잠깐만"
전화가 '툭' 끊겼다. 뭐지.
그리고, 잠시 후 센터 문이 벌컥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평소에 내 앞에서 보였던 동네 바보는 어디 가고, 시창은 단정한 올백 스타일에 감색 슈트를 입은 '영화배우'의 모습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나에게 '윙크'를 한다.
그의 등장에 당황한 것도 잠시, 마침 스포츠 센터장인 오여사가 피티실에서 나오다가 시창을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따라나오던 센터 선생님들 역시 그의 얼굴을 보더니 괴성을 질렀다. 시창은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나에게 묻는다.
"여기 사장님이 누구예요?"
오여사를 가리키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번쩍 들고 "저요! 저요!!"를 외치고 있었고, 시창이 남자다운 야성미를 뿜으며 센터장에게 다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오여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센터 밖으로 향했다. 그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따라나온 난, 얼떨결에 그의 차에 탔다.
"사장님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아...... 별 말 안 했어요. 예랑씨 오늘 빌려주면 다음 주에 밥 사드린다고 했어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동을 켜던 그가 내 시선을 느끼고 잠시 곤란한 미소와 함께, 금세 무장해제되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 사고 친 거 아니에요. 무경이 형이 미팅이 늦어져서 자기 대신 나보고 예랑씨 예쁘게 모셔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난 그에 동의한 거고."
"무경씨가 편하게 오면 된다고 했는데......"
"예랑씨가 잘 모르나 본데, 원래 남자들은 자기 여자가 누구보다 돋보이길 원해요. 물론 안 꾸며도 이미 콩깍지가 씌어서 예랑씨밖에 눈에 안 들어오겠지만. 뭐, 암튼 한번 가봅시다."
더 이상의 이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가 속도를 내어 청담동으로 질주하였고, 잠시 후 헤어샵 앞에 멈춘 그가 날 안으로 이끌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5~6명의 뷰티 디자이너들이 다가왔고, 마치 인수인계를 하듯이 내 손을 그녀들에게 넘겨주며 시창은 팔짱을 끼고 근처 소파에 미끄러지듯이 앉았다.
그녀들에게 끌려가듯이 헤어 룸으로 들어간 난, 스타일링과 함께 메이크업, 그리고 의상 피팅을 동시에 진행받았고,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시창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 룸으로 향했는데, 최신 패션잡지를 넘기고 있던 그가, 나의 등장에 몸을 세우며 눈을 가늘게 뜬 채,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로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깜짝 놀랐는데, 이전의 촌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 탄생한 아름다운 동화책 속의 여자가 보였다.
세련된 헤어 컬링과 메이크업, 그리고 살짝 가슴골이 패인 모던한 블랙 미니드레스까지.....
한동안 그 모습에 넋이 나가 쳐다보고 있는데, 시창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시죠."
살짝 그의 손을 잡으며 샵 밖으로 향했다.
문체부 후원 파티가 열리는 광장동의 호텔 안으로 시창의 차가 진입하더니, 입구 앞에 멈추어 선다.
차에서 내려 진행요원에게 차 키를 건네어 준 그가, 차 문을 열어 날 에스코트한다. 그의 손을 잡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데 1층 로비부터 파티 세팅이 되어 있는 화려하고 모던한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리셉션장 안에는 각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한 껏 차려입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고, 곳곳에 웨이터들이 와인과 요리를 테이블에 서빙하고 있다.
시창과 함께 메인 홀로 들어서자, 각자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주목을 하며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홀 한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그를 따랐다. 홀 중앙, 얼음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무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그의 뒷모습만 보았는데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에게 다가가자, 마침 무경이 뒤돌아보았는데, 마치 마법에라도 걸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고급스러운 블랙 슈트를 입은 그의 눈이 날 향해있고,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무경이 내 손을 잡고 있는 시창의 손을 쳐다본다.
금세 미간이 찌푸려지고, 시창은 아랑곳없이 '씨익' 웃으며 내 허리에 팔을 두르려는데, 무경이 한 발 빨랐다.
재빨리 내 손을 낚아챈 그가 시창을 노려보더니 저리 가라며 손짓을 했다.
뾰로퉁해진 시창이
"뭐야,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예랑씨를 보라고. 오늘 내 작품이라고. 형은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고맙고 수고했어. 일 끝났으면 이제 가 봐. 저기 네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삐죽 입술을 내밀며 영화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로 향하는 시창.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날 감싸듯 안으며 입술을 귀에 대며 속삭이는 무경.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알았지?"
"왜요?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그가 말없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내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
이내, 그의 곁으로 출판계 대표들이 다가오자, 무경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를 따라, 그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얘기가 길어지는 무경에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한 뒤, 그에게서 멀어졌다.
호텔의 화장실은 온갖 고급스러운 대리석과 은은한 조명이 인상적이었고, 단독으로 파우더룸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마치,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있는 듯한 기분에 뭔가 자꾸 위축되는 듯한 그러한 낯 선 느낌.
12시가 지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자꾸 초조해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마치 내가 아닌 화려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원래의 잿빛의 내 모습이 들킬까 안절부절못하는 불안감.
한 숨을 내쉬며 일어서려는데 파우더 룸으로 한 여자가 들어섰다.
'정연'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나를 알아본 그녀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랑아. 어머, 너 맞지? 서예랑."
"정연아......"
잠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거울 앞에 앉는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우아해보였다.
졸업 후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고, 졸업공연 이후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할 자리가 없어 어색함과 낯선 분위기가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잘 지냈니?"
"응, 나야 뭐 그럭저럭."
"그렇구나."
"이번 공연도 잘됐다면서. 축하해."
"응. 그 덕분에 다음 달에 뉴욕으로 가기로 했어."
"그래?"
"응. 넌 어떻게 지냈어? 애들 통해서 간간이 네 소식을 듣긴 했는데 요가 한다면서. 사실이야?"
그녀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동안 궁금했거든. 그 날 이후 갑자기 네가 사라졌잖아. 소식도 끊기고. 그래도 오늘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너도 초대받은 거야?"
"아...... 그게."
우물쭈물 답을 못하는 날 보던 그녀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잠깐, 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그녀.
"응 선배. 나 화장실.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날 쳐다보는 정연.
"필상 선배랑 같이 왔어. 우리 사귀고 있거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는 척을 하려다가 혹시라도 필상 선배가 곤란해질 까 봐 말을 아꼈다.
"그랬구나...... 잘 됐다."
"너 괜찮아?"
"응?"
"너 학교 다닐 때 선배 좋아했잖아. 난 알고 있었는데, 아마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을 걸."
고개를 숙이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네가 오해한 거야.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그래? 정말?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지?"
그녀의 집요한 눈빛에 흔들리는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대답을 확인한 그녀가 경계를 풀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활짝 웃는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미안해 오해해서. 나중에 선배랑 같이 밥이나 먹자."
"응. 그래"
"기다리고 있대서, 먼저 가볼게. 또 보자."
그녀에게 손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필상 선배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당혹스러움이 들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바보같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나 파우더 룸 밖으로 나가는데, 복도 앞에 서 있는 그. 필상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발신을 걸다가 안에서 나오는 내 모습에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군 채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선배 안녕하세요? 정연이가 선배 찾으러 갔는데, 못 봤어요? 좀 전에 나갔는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니, 아까 홀에서 널 보긴 했는데, 네가 맞는지 몰라서 한참 쳐다봤어. 역시 너였구나."
그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내 핸드폰의 벨이 울리고, 액정을 쳐다보니 '무경'이었다.
그의 전화를 받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필상이 아련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잠시, 얘기 좀 할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예랑아."
"네? 아, 그게 저 일행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필상이 내 손목을 잡는다.
애절한 그의 눈빛.
"잠깐이면 돼. 예랑아. 나 곧 뉴욕에 가야 해. 잠시만 시간 좀 내줘."
그에게 잡힌 손을 쳐다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의 뒤에서 구두굽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놓으시죠?"
무경이었다.
그는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다가와 필상의 손을 밀쳐냈다.
내 앞을 막아선 무경과 필상.
필상과 마주 본 채 내 앞에 선 무경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필상의 떨떠름한 얼굴.
"누구시죠?"
필상의 질문에 침착하고 날이 선 낮은 목소리로 무경이 대답했다.
"약혼자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내 양 어깨를 껴안으며 그 앞에 섰다.
긴장감이 복도를 휘감고, 당당한 무경과 달리, 필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날 바라보는 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