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들이 수업 때문에 자리를 비운 터라 그동안에 사무실 정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하지만 궁금했다. 그녀가 날 찾아온 이유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감색 스커트에 하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자체가 고급스러워 보였다.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던 그녀가
"무경이랑 사귄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거침없고 당당한 말투.
그녀는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무경이랑 나, 전에 만났던 건 알고 있나요?"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좀 불편해서요. 이런 질문들이."
그녀가 앞에 놓인 물컵을 쳐다보자, 난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고,
그런 나의 반응에 그녀가 '피식' 웃더니
"저 막장드라마 안 좋아해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당황스러워서요. 설명은 제가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녀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로 건네었다.
- Y대학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이승주-
"무경이의 주치의입니다."
"네?"
"몰랐군요. 얼마 전에 시창이가 테니스 치다가 다쳤다고 찾아왔는데, 그때 잠시 예랑씨 얘기를 듣긴 했어요."
"아, 그럼 그때....... 이 닥터라는 분이......"
"네, 그게 저에요."
방긋 웃는 승주.
"오늘 예랑씨 찾아온 건, 무경이랑 나 사이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요. 몇 년 전에 우리가 사귄 건 맞지만, 결국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서로 합의하에...... 어차피 무경이 주기적으로 컨디션 체크도 해야 해서 다른 병원에 넘길 상황도 아니었고, 난 질퍽한 거 싫어해요. 그래서 감정 정리 끝냈고, 편한 마음으로 그의 옆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구요. 지금은 친구이자 주치의일 뿐이니까."
"무경씨가...... 주기적으로 관리받아야 할 만큼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정신적인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죠.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돌발적인 스트레스가 가장 커요. 어떤 때는 일상생활이 안될 정도니까. 아무튼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고, 자세한 건 직접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게 날 것 같아요."
난 그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리 주치의라고 해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거리낌 없이 다른 여자를 들인다는 게 이해가 안돼서요. 승주씨가 이렇게 설명해주신 거 정말 감사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아마도....... 나한테 많이 실망했을 거예요."
더 묻고 싶었다. 그와 왜 헤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더 이상 친구 이상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그녀가 묻는다.
"무경이 사랑하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다.
"피하지 말아요. 망설이지도 말고, 문제가 있으면 부딪혀서 해결하세요. 나처럼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아요. 의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까. 사랑이란 거 그렇게 만만하지 않더라고요."
말을 멈춘 그녀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예랑씨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시간 뺏었네요. 그럼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싱긋 웃으며 문을 열더니 뒤돌아본다.
"아, 그리고 혹시 시창이 보면 전해주세요. 이번에 잡히면 뺨으로 안 끝날 거라고. 그럼."
차분하게 할 말을 끝내고 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경과 닮아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난 한동안 멍하니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 두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가 수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소파에 앉는 하나.
"여자 왔다 갔다며? 누구야? 신입회원?"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물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센터 밖으로 나오니, 하나의 애인이 기다리고 있고, 두 사람은 같이 저녁을 먹자며 권했으나, 난 괜찮다고 그 자리를 피해 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 홍제천을 따라 걸어가면서 손에 꼭 쥔 핸드폰 화면을 계속 열어보았다.
그리고, 어느 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연남동 무경의 집 앞에 와 있었다.
거리에 하나둘씩 가로등불이 켜지고, 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그의 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후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무경씨? -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숨소리.
- 어디야? -
- 나 집 앞. 자기는? -
- 난 밖인데...... -
- 멀리 있어? 또 출장 간 거야? -
- 아니, 그냥 바람 좀 쐬러 나왔어. 답답해서. -
- 그렇구나..... 알겠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나중에 연락 줘요. -
그의 목소리에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다. 수화기 너머로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온몸이 떨려온다.
그의 안부를 물은 후 전화를 끊으려는데
- 괜찮으면...... 여기로 올래? -
- 응? -
- 나 혼자 있어. -
- 어딘데? -
- 우리 자주 왔던 곳. 한강변에...... -
- 아....... -
- 기다릴게. -
삼십 분 후, 난 망원지구 안으로 들어섰다.
12월이 다가오자,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예전만큼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한적한 길을 지나 그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는데, 한 걸음 한걸음 다가갈수록 마음이 떨려 진정이 되지 않는다.
강가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한쪽 멀리에서 무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고, 나의 인기척에 뒤돌아선 그의 얼굴. 날 바라보는 복잡 미묘한 그의 표정에 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더......
그리고 마침내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았는데 그 역시 긴장되어 보였다.
"무경씨. 잘 지냈어?"
그가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왜, 많이 바빴어?"
또다시 고개를 젓는 무경.
"얼굴이 왜 그래? 잠은 제대로 잔 거야?"
그대로 멈춘 채,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해 무경씨. 내가 잘못했어......."
"........"
"자기편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나 때문에 신경 써준 거 알아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는 그.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던 거. 우리 사이...... 내가 경솔했어. 정말 미안해."
한 마디 한 마디를 어렵게 꺼내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날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이제 아니구나내가. 정말로 아닌 거구나.'
그리고 그때, 그가 성큼 다가와 날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순간 난, 눈이 동그래져
"무경씨....."
"쉿, 잠깐만 안고 있을게. 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잠깐만."
그의 가슴으로 전해지는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후, 심장이 멎어있던 것처럼 크게 숨을 쉬는 그. 날 끌어안은 그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왜 이렇게 힘들게 하니, 그동안 죽는 줄 알았어. 네가 정말 떠날까 봐 너무 두려웠어."
그의 말에 눈물이 찔끔 배어나왔다. 그에게 안겨 있던 난 잠시 후, 몸을 떼내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신 안 그럴게. 미안해."
그제야 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무경.
"난 자존심도 없나 봐. 날 두고 간 건 넌데, 이렇게 또 찾아온 널 뿌리칠 수가 없어. 나 바보 맞지?....."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난 그의 목을 안은 채 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그. 난 더욱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내, 스르르 눈을 감는 무경. 내 허리에 양 팔을 두르더니 '꼭' 안아준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한강변에서, 겨울이 다가오는 이 저녁, 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무경과 입맞춤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