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성장 Feb 22. 2022

손자가 장례식의 상주가 되는 '승중상'에 대해

혹시 주변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친구가 있다면

승중상(承重喪)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할머니(또는 증조할아버지•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복을 입고 상례를 치르는 것.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재직하던 회사의 팀장님은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셨던지라, 애도하며 내가 장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그러나 내 가정사를 잘 모르는 팀원들은 부모님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며칠씩이나 회사에 휴가를 내는지 의문인 눈치였다. 팀장님은 사내 메신저를 통해 내 할아버지의 부고를 알렸지만, 정말 가까운 동료 외에 조문이나 연락은 드물었다.



당시에는 그게 정말 서운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인데. 매일 얼굴 보며 일하는 사이인데도 연락 한 통 없다는 것에 현타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 사정을 모르는 분들이 많았으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확률적으로 많이 편찮으시고, 또 시간이 되어 돌아가시기도 하니까. 사는 게 바빠 그랬을 수도 있고, 내 인망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상주가 되려고 한 이유



사람들에게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니 미루어두고, 당장 누가 할아버지 장례식의 상주가 되어야할지 정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것을 느낀 순간부터 늘 긴장하며 내가 상주가 된 상황을 상상하곤 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버지와 고모, 1남 1녀를 두셨다. 내 아버지가 장남이었지만 돌아가셨으니 보통 고모의 남편 즉 고모부가 상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고모의 가족은 10여 년 전 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하필이면 코로나가 극심한 상황이라 입국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고모는 영상통화 너머로 오열하셨지만 당시에는 딱히 오실 방법이 없었다.



또 할아버지는 형제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오래도록 이어진 앙금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말던 상관도 안 할 것 같았다. 나는 형제들에게 상주 역할에 대한 논의를 꺼낼 생각이 없았다. 결국 할머니와 깊이 상의 후 할아버지의 부고 조차 알리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내가 상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상주를 못하게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마음도 생겼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평안할 수 있도록 전부 내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른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조카 분과 나의 남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혼인신고를 마쳤다.) 이 상주를 맡게 되었다. 도움을 주신 할아버지의 조카 분과 특히 남편에게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한다.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으니까.








 이런 상황은 부모님 상이랑
똑같이 생각하는 거래.
승중상이라고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꼭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매일 조문을 와주었던 친구가 말했다. 그 친구의 이야기 덕분에 위로를 많이 얻었고, '승중상'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상황을 칭하는 단어가 예전부터 있었다니,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나만 힘들고 벅찼던 게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承(승) : 이을 승, 重(중) : 무거울 중



승중상은 '무거운 책임을 잇는 장례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어린 자녀가 상주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부모 가정에서 자라 온 나도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상황에 직면하니 슬픔과 책임감이 뒤섞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온전히 버티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뒤로 누군가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꼭 조문을 가고는 한다. 정말 가기 어려운 거리라면 위로와 함께 부의금을 보내주었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을지도 모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깊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전 01화 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