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힘든 건 내 사정이고, 밥벌이는 밥벌이다.
병원에 도착하면 택시를 불러 할머니를 집으로 보낸 후, 나는 할아버지의 소변주머니를 비우고 네뷸라이저(기관지 치료, 거담제)를 해드린다. 그리고 순환이 안돼 코끼리처럼 부은 다리를 연신 주물러드렸다. 할아버지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푹 찌르면 파인 자국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리고 수건을 적셔 손과 발, 얼굴을 닦아드린 뒤 로션도 발라드린다. 폐암 말기 환자인 할아버지는 숨 쉴 때마다 쇳가루 갈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퇴사해서 내 일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투병과 임종에 거쳐 나는 직장인이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업무량이 가혹하게 많은 곳이었다.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었고, 한 명이라도 사정이 있어 결근하면 다른 동료들이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위독하셨을 때도 자주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할머니와 간병을 교대하러 정시퇴근을 할 때는 다른 팀원에게 피해 주기 싫은 마음에 외장하드에 자료를 모아서 퇴근했다. 이 마저도 굉장히 눈치 보였다. 동료들은 전부 모니터 앞에 피곤에 절은 얼굴로 앉아있는데, 내 사정이야 어찌 됐든 표면적으로 난 퇴근하지 않는가.
간호사 선생님이 할아버지에게 수면에 도움 되는 약과 진통제를 주사했다. 할아버지가 잠든 것을 확인하면 병실 바로 옆의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셀프 야근을 했다. 그러다 지쳐 휴게실의 긴 의자를 침대 삼아 쪽잠을 잤다. 이 때는 중요한 미팅이 없으면 꾸미는 것도 사치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위생만 겨우 지키며 회사를 다녔다. 너무 고되고 속상해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나는 별로 선택권이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계속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도 본인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는 걸 아시면 더 가슴 아파할 것 같아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문제고. 그냥 어떻게든 했다.
나는 내가 이만큼 힘들다는 것을 굳이 티 내고 싶진 않았고, 평소 아쉬운 소리 잘 못하는 성격이다. 나약해 보이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도 그땐 너무 벅차 누군가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선임에게 내 상황과 힘든 심정을 스치듯 털어놓았는데, 그분은 아주 짧게 '아 정말? 어떡하니.' 하시며 바로 본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애인과 다툰 이야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섭섭했다. 근데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이 다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없다. 회사에 왔으면 구성원에게 피해 안 끼치고 열심히 내 할 일을 잘하는 게 최고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상황이 퍽 서러웠는데, 왜냐하면 팀원들은 내 다크서클과 입술의 소금꽃을 보며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않았다. 돌이켜보면 촉박한 일정에 쫓기며 잠도 못 자고 일하는데 서로 감정을 들여다볼 여유가 과연 있었을까 싶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할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신 후 나는 그 다음날 바로 출근했다. 하루 정도는 쉬고 싶었지만 이미 상중에 자리를 비워 계속 울려대는 회사 메일도, 단체 카톡방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사랑하는 가족이 한 줌 재가 되는 걸 보니 일할 의욕이 뚝 떨어지긴 했다. 그냥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내 할 일을 책임 못지는 것도 싫었고, 남한테 욕먹기도 싫어 멘탈 부여잡고 출근했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야근을 했다. 밤새도록 영혼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는데 웃프게도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마음이 잠시나마 흐려졌다. 장례식이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회사는 그대로였고, 일은 너무 바빴고, 아무도 장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는 슬픔을 누른다. 슬퍼하는 감정에 매몰되고 싶지만 현실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늘 끊임없이 생산성을 요구한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 있어 다 때려치우고 싶대도 그건 내 사정일 뿐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슬픈 일은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서운하고 외로운 감정을 혹시 나 또한 남에게 느끼게 한 것은 아닐는지 돌아보게 되는 시간들. 나는 사는 게 바빠도 누군가 힘들어 보이면 꼭 가서 말 한마디 걸어주리라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