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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성장 Feb 27. 2022

'너 아빠 없고 할머니랑 산다며?'라고 놀렸던 친구에게

 넌 부모님 다 계신데 왜 그러는 거냐


기억도 가물한 초등학교 3학년, 유일하게 내가 못 잊는 사건이 있다. 어느 날 단짝 친구에게 슬쩍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 애는 우리가 조금 다투자마자 곧바로 '아빠도 없이 할머니랑 사는 불쌍한 주제에' 하며 내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더니 심지어 같이 다니는 무리에 소문을 퍼뜨려서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3학년이면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0년도 안된 아기인데. 분명 성악설이 맞다.



아무튼 초딩 시절,  정신연령 나름 엄청난 배신과 편견의 시선을 겪어보니 ' 가정은 남들과 다르고 이게 말해서는  되는 이야기구나' 생각이 자연스럽게 똬리를 틀고 자리잡았다.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연세에도 나를 애지중지 키워주는 상황이었는데, 부모 대신 나를  보살피려 무던히도 노력하셨다. 그런데 나는 내가 속한 가정이 남들이 정해놓은 '정상적 범주' 들지 않아 부끄럽다 여겼다. 그리고  사실은 감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순간 약자가 되어버리고 무시를 당할  같았다. 이런 생각은 평생 지긋지긋하게 나의 발목을 잡아댔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항상 초중고 시절 가족관계를 조사하거나 등본을 떼오라는 말이 싫었다. 혹시나 같은 반 친구들이 내가 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될까 봐 걱정됐고, 선생님이 날 가엾게 보지는 않을까 신경 쓰였다. 아버지가 없다고 하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 '할머니, 할아버지랑은 잘 지내고?' 하며 측은한 목소리로 묻곤 하셨다. 그게 싫어서 나는 새 학기가 되면 아버지가 있는 척했다. 가족관계 조사서에 아버지의 생년월일과 생전 다니셨던 회사 이름을 적어냈다. 몇 번 해보니 어차피 이렇게 적어내도 잘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어설프게 솔직했을 때 더욱 주목을 받고, 내가 원하지 않는 동정을 받았다.







조손가정, 한부모가정의 자녀에게 이런 '불쌍한 아이' 프레임은 치명적이다. 저 때 느꼈던 주위의 시선들 때문에 나는 남 눈치를 많이 살피고, 다혈질의 방어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누가 내 가정사를 알면 나를 깎아내리고 불쌍히 여길까 봐 늘 신경이 곤두섰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대체 내 아버지가 천재지변 같은 사고로 돌아가신 게 뭐가 부끄러울 일이고, 먼저 간 아들의 하나 있는 자식을 책임지고 기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오히려 대단한 일이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이혼가정 등 이런 단어들은 가정 내부의 디테일한 요소(정서적 유대감, 경제적 안정 등)는 싹 무시하고, 그냥 아이를 '아버지 혹은 어머니 없는 불쌍한 아이'로 정해버리는 마법이 있다. 실제 가족 구성원의 부재로 경제적 정서적 불안정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문제는 비단 한부모 가정과 조손가정에게만 국한된 사실은 아니다. 그래서 섣불리 넘겨짚고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나는 오히려 너무 어릴 적 아버지를 잃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없는 상태가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별로 정서적,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마음이 뒤틀리고 더욱 어려워졌다.


 




다행히 최근에는 더 다양한 가정의 형태가 생겨났고, 점점 이를 받아들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처한 상황으로 비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속단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당연히 그 노력에 나도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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