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느긋 Mar 26. 2024

나에게 어울리는 옷

취미가 발견이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무렵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다들 취업준비를 하느라 바쁘거나 하나둘 자기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모여서 맛있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차에 한 친구가 말했다. “뭔가 다들 자기 직업을 닮은 옷을 입었네”라고.


내가 보기에는 다들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역시 우리 친구들끼리는 분위기가 비슷하군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 친구는 다름의 시각으로 본 점이 흥미로웠다. 아마 요즘 말하는 TPO 같은 걸 얘기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군집으로 보던 친구들에게서 오히려 개별성을 발견한 것이 흥미로워서 그때부턴 나도 새로운 모습을 잘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는 말 아래 어떤 집단의 대표성을 건져 올리려 했던 건 좀 패착이었던 것 같지만.


가령 어떤 매체에서 특정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 캐릭터를 표현할 때,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어떤 식으로 콘셉트를 잡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는 그런 일에 꽤나 몰입해 있었다. 외부회의를 갈 때마다 종종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길을 걸어가다 말고 거울이나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본 적도 있었으니까(편집자의 옷차림이란 어떤 것인가). 남들이 봤을 때는 크게 차이가 없는 부분도 혼자서만 크게 다를 수 있다고 느끼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으면서도 나를 말할 수 있는 대표적 키워드 안에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나는 어떤 차림인가’보다는 ‘남들 눈에는 나는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관심에 가까웠던 것 같다.


출판사가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은 어떤 느낌으로 표현될까 관찰하며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봤을 땐 보편적인 ‘어떤 느낌’이랄 게 있을지 몰라도 세세하게 봤을 때는 다들 워낙 천차만별이었고 이렇다 할 특징점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였다. 직업이 다 비슷하다고 해도 개인의 성격에 따라서 보이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으니까. 직업을 다루는 드라마를 볼 때, 한 공간에 같은 직군인 등장인물이 여럿 나오지만 그들의 스타일링이 모두 같지는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출판사에서 일해요” 말하고는 “팔 토시 끼고 손을 호호 불진 않아요” 같은 농담을 덧붙인 적도 있는 걸 보니 내 머릿속에도 어떤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이야기를 하던 중, 상대방이 “말투가 좀 어색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말싸움을 하던 상황이라 시비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는데, 왠지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라서 “왜? 내 말투가 어떤데?” 물어보기도 했다. “네가 말하는 거랑 내가 말하는 거랑 뭐가 달라? 예를 들면 어떤 점이?” 하니까, “다르다”며 어색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예를 들면 ‘예를 들면’이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그 후로 같은 과를 나온 친구들이나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에게 이런 일화를 이야기해 주니, 친구들 또한 종종 그런 말-말을 글처럼 한다는 이야기 같은-을 들은 바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점도 상당히 흥미로워서 괜히 사람들과 대화할 때 구어체와 문어체의 뉘앙스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런 말투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말투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엔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과 말투가 닮았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회사 사람들의 말투를 닮아갔다. 반대로 내 말투를 닮아간 누군가도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웃기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남자 중학생 같은 말투를 쓰시네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으니까. 추측해 보기론 어색한 사람들과 있을 때 재간둥이 역할을 맡아야지 싶을 때 그런 말투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문어체로 말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말투를 쓰는 사람이 된다니, 사람은 정말 다면적이고 그러므로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 같다.


옷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 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말투를 닮아가는 것은 맞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귀로 자주 듣던 말이 입으로도 출력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논리를 점프해 보자면, 부부가 서로 닮아 보이는 것도 결국은 닮은 사람끼리 끌리는 것도 있겠지만,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활 패턴을 가지고 습관이 닮고 말투도 닮고, 웃는 상황이나 우는 상황이 비슷해지면, 주로 사용하는 얼굴의 근육이 비슷해질 테고 그 과정에서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아울러 ‘인상’이라 부르는 것일 테고.


부부관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몇 년 전, 같이 일하던 사람이 무감한 얼굴로 ‘어머나’ 같은 감탄사를 말하는 걸 보고, 이런 톤의 감탄사라니 새롭네,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 후 나도 모르게 스스로 ‘어머나’ 하는 말투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놀란 적도 있었다. 또 시간이 지나서는 내 안에서 체화되어 ‘...어머!’로 끝맺는 정도로 내게 맞게 변형되었다.


내가 타인의 말투와 행동을 유난히 잘 흡수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모르겠다(손민수 하려던 건 아니었고요). 반대로 잘 관찰하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변화도 알아차리고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걸 배웠네 깨닫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쓰는 말투를 다른 사람이 옮아서 따라 썼는데 그걸 다시 내가 발견하고는 저 사람 말투를 내가 따라 쓰고 있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능성은 너무나도 열려 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친구의 말투에 특정한 추임새가 있는 것 같아서, “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라고 딴에는 쿠션을 깔면서, “너 언젠가부터 ‘오호’ 하는 추임새를 재밌는 억양으로 쓰는데 주변에 누가 그런 말투를 쓰고 있나?” 하는 무례한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단순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상대방은 조금 놀라면서, 자신이 그런 말투를 쓰고 있는 줄도 몰랐다고, 원래부터 쓰는 거였는데 네가 최근에야 알아차린 것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친한 친구라서 궁금한 걸 못 참고 불쑥 묻고야 마는 내 이런 점을 이해해줬기에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발견에 심취해서 그런 점들은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깨닫는 점은 그때의 내가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데에 크게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고, 섣불리 판단하려 들고,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추측하려 하고... 이런 행동들은 스스로를 피로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생각이 사실이라 믿어버리기까지 하면 더 위험하다. 몇 가지 단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또한 인간관계에서 경계해야 할 성급한 태도이기도 하고. 


그때의 나는 그러면서 사람에게 너무 쉽게 겁먹고 너무 쉽게 마음을 내주고 너무 쉽게 실망하고 너무 쉽게 돌아섰다. 이제까지 만나온 이런 사람들의 경향상 이 사람 역시 이럴 것이다, 나에겐 빅데이터가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내 삶의 길목에 놓아두고 온 관계들이 얼마나 많았을가.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온 관계들 중 나를 새로운 국면으로 데려가 준 관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뭔가 다들 자기 직업을 닮은 옷을 입었네”라는 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지만, 결국 친구들끼린 다들 비슷한 느낌이네, 랄지 직업에 맞는 옷을 입는다, 랄지 그런 것들은 모두 내 고정관념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을 만날 때 혹은 나 자신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 경계한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는다기보다는 내가 살아가면서 가고 싶은 방향으로 옷을 덧입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게 좋은 사람도 사람도 나중에는 다른 걸 좋아할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좋아하던 걸 계속해서 더 강하게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다면적으로 복잡한 인간인 것처럼 타인 역시 그런 건 너무 당연하다. 


오늘의 나에게서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더할 것은 더하면서 형성되어 온 것이 지금의 나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로 당도한 것처럼,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에게로 가고 있다. 사람은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라고 믿으면서, 머릿속에 자꾸만 저절로 만들어지곤 하는 고정관념에 스스로 금을 내고 싶다. 금 간 것이 다시 견고히 닫히려고 해도 다시금 무너뜨리고만 싶다. 그것이 새로운 길을 열고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줄 거라 생각하니까.


이전 15화 때로는 선생님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