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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Dec 26. 2023

나랑 잘 맞는 걸 찾는 게 쉽지가 않아

나의 다이어리 방랑기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머릿속에 떠도는 상념은 빠르게 휘발된다 믿기에 생각나는 대로 근처에 있는 종이를 끌어다 무엇이든 휘갈긴다. 그러고 난 뒤 종이 쪽지는 다이어리에 끼워두고. 그러다 보니 나중에 다이어리를 열다 툭 떨어진 종이를 보면 이게 뭐였지? 하며 궁금해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냥 생각만 하다 날려 보내기보다 나중에 보면서 이게 뭐였지? 복기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탓에 이런 습관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다만 정리하는 것은 귀찮아하는 편이라 휴대폰 어플에도, 노트에도 어질러진 메모들이 가득하다.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노트 하나를 꾸준히 쓰며 그 노트에 모든 것을 아카이빙 하는 것이다. 납작하고 판판한 노트를 사서 여러 기록을 채우고 필압과 손때로 인해 낡고 해지고 두툼해진 노트의 마지막장을 비로소 덮는 것. 삶과 함께 쌓여가는 몰스킨 검은색 몰스킨 노트 더미들. 그러나 무엇에든 쉽게 질리고, 몰스킨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탓에 나의 다이어리는 그해 그해 다른 모습으로 쌓여만 갔다(몰스킨 종이 너무 미끄럽지 않나요?).


다른 사람들은 몰스킨 하나만으로 매년 잘만 쓰는데, 나는 어째서 이토록 쉽게 질리는가. 

나는 왜 그 감성을 가지지 못하는가.


한때는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게 이렇다 할 취향이 없어서 새롭게 나온 좋아 보이는 것에 홀리고, 그것을 사고, 후회하고 또다시 새롭게 나온 좋아 보이는 것에 귀가 팔랑거려 구입하고 적당히 쓰고 다음 해를 맞이하는 것. 남이 기록한 것은 좋아 보이고 내가 기록한 것은 허름해 보이는 것. 나의 기록은 늘 그런 반복이었다.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 나 또한 매년 다이어리 사는 것을 좋아해서, 그간 참 다양한 다이어리를 써왔다. 취향이 있든 없든 그런 방식으로 해서 내게 맞는 다이어리도 대충 좁혀지게 되었는데 대충 아래와 같은 조건이 필요했다.


1. A5(148*210mm) 사이즈를 기준으로 작은 것

- 이 정도 크기면 어느 가방에나 휘뚜루마뚜루 잘 들어간다.

- 하지만 이보다 너무 작으면 글씨를 쓸 공간이 부족하다.

2. 하드커버가 아닐 것

- 하드커버는 펼치기가 어려워서 싫다.

- 노트를 펼쳤을 때 양판면의 양감이 부족할 때 기울어짐의 영향이 크다.

- 소프트 커버로도 그럭저럭 만족하지만 무선사철제본일 경우 더 좋다

- 무선사철제본일 경우엔 하드커버인 게 오히려 좋다.

3. 내지 디자인은 최소한 일 것

- 따라서 만년형 다이어리가 좋다.

- 룰드 노트나 모눈종이 형태도 괜찮은 편.

- 하지만 도트는 싫다.

- 줄이나 점선 혹은 뭘 어떻게 쓰라는 둥 참견이 많으면 거슬린다.

4. 먼슬리/무지노트의 구성일 것

- 위클리보다 먼슬리 공간을 크게 쓰며 한 달의 흐름을 파악하는 걸 좋아한다.

- 한 주보다는 한 달씩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 다이어리엔 일정과 마감 정도만 간단히 기록하다 보니 한 달 흐름을 파악하는 게 좋다.

- 월별 기록 뒷면에 위클리 없이 바로 무지노트가 나오는 형태를 선호한다.

- 반드시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구성일 것!


이 흐름을 정리하다 보니 몰스킨 노트를 쓰지 못한 이유들도 추론할 수 있었다.


1. 몰스킨 먼슬리는 월-일의 구성이다.

2. 먼슬리의 기록칸이 나에게 너무 작다.


매년 다이어리를 구입할 때는 '먼슬리 다이어리'라는 키워드로 주로 검색을 하곤 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월-일의 구성이었고, 예전에는 만년형을 선호하지 않았어서 만년형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조건에 맞는 걸 찾으면 으레 먼슬리 이후에 위클리 페이지로 이어져서, 어느 해에는 적당히 기준에 맞는 것을 구입하고 위클리를 무지노트인 양 사용한 적도 있었다.


이런 기준이 있다고 해도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변덕이 심한 편이라는 것이다.


실은 올해 우연히 마련한 다이어리가 구성도 좋고 쓰기에 괜찮아 다 쓰고 나서는 이걸 내년에도 사서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주문 직전까지 갔으나, 하반기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오랜 시간 동안 먼슬리 다이어리의 신봉자였던 내가 먼슬리 다이어리에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건 기본적인 일정을 휴대폰 기본 캘린더 어플에 기록하면서부터다. 지난해부터 올해 사이에 급한 약속을 정할 때마다 다이어리가 근처에 없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일정을 어디에 적어두었는지 모르는 애매한 상태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답답해졌다.

주변에 물어보니 심플캘린더, 네이버캘린더 등 스케줄 관리 어플을 사용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몇 가지의 캘린더 어플을 다운로드해본 결과, 어디에 연동하고 말고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아이폰 기본 캘린더 어플에 기록하는 게 가장 편했다. 게다가 나는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고 있어서 캘린더가 모두 연동되어 기본 캘린더 어플에 기록해두면 휴대폰, 맥, 태블릿에 연동되니 교차 편집할 일도 없고 편했다. 


이렇다 보니 먼슬리 어플의 쓸모가 줄어들었다. 먼슬리뿐 아니라 다른 변화도 생겼다.


일단 회사를 벗어나니 나인투식스를 기본으로 두고서 정하게 되는 여타 회의 일정이 아니라, 일정의 변동성이 다양해졌다. 운동이나 지인과의 모임, 자잘한 업무 미팅이 들쭉날쭉하게 생겨나면서 스케줄을 조금씩 주 단위로 관리하는 게 편해졌다. 주 단위로 관리하던 일정은 더욱 촘촘해져서 일 단위, 시간 단위로 나뉘기도 했다.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회사에서는 어떤 업무가 들어올지 몰라 일련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두고 다른 유관업무를 처리하면서 개인적인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최근 1년간은 스스로 오늘 뭘 할지를 정하고 내 스케줄을 관리하며 보냈다. 좀더 빼곡하게 시간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할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전의 루틴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그것을 조금씩 허물고 나만의 루틴을 새롭게 쌓아나기 위해 필요했던, 어색하고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일정관리를 주단위+일단위로 하는 것에 스스로가 안정감을 느낀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나자, 다이어리 역시 이에 맞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주 단위로 기록할 것 - 월-일인지 일-월인지는 그다지 의미 없다.

2. 일 단위로 기록할 것 - 시간 배분이 좀 더 촘촘하면 좋겠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두고서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탐색했다. 알고리즘의 영향이겠지만 여러 사이트에서 내게 다이어리를 추천해 주었다. 인스타그램 탐색란에는 온갖 시간관리루틴과 문구스타그램들로 채워졌다. 심경의 변화 이전에 후보로 둔 다이어리는 총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한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굿노트 페이지였고 또 하나는 지난해 사용했던 두성종이 인더페이퍼 다이어리였다.


두성종이 캘린더의 경우 2023년에 나온-올해 사용한 다이어리다- 만년형 무선사철제본 다이어리가 크기도 딱 알맞고 종이의 질도 좋은데다가, 두성종이의 다양한 지류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루하지 않고 좋았다. 먼슬리+무지노트의 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위클리 페이지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는 직접 페이지를 그려서 사용하면서 무난하게 사용했었다. 

하지만 두성종이에서 나온 2024년 캘린더에는 해당 다이어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만년형인 2023년 버전을 다시 한번 사서 사용할까 싶었으나 2023년 캘린더도 또 구매해야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두성종이의 견본지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필요 없는 2023년 캘린더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한 굿노트는 한참 아이패드를 사고 기록하는 것에 흠뻑 빠졌을 무렵 이것저것 기록하기 좋아 올해 1/4분기 동안 열렬하게 사용했는데, 이 역시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쓸모가 없고 편하게 이것저것 기록하며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용도라기보다는, 모든 시간이 지난 후에 한 주를 복기하며 천천히 꾸미고 다듬는 사람에게 더 적합한 다이어리인 것 같았다. 


나에게 다이어리는, 연마를 위한 기록보다는 돌진을 위한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2024년 버전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무료제공되어 한번 더 써봐, 하며 유혹했으나 단호하게 포기했다.


결론은, 지난주에 방황 끝에 내년에 쓸 새로운 다이어리를 주문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키퍼의 스페이스다이어리인데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마음에 들었다.


소프트커버 사철제본이고

PVC커버로 감쌀 수 있고

6개월 동안 사용할 수 있고

먼슬리 부분이 만년형이고

주간 일정을 써머리 후 일간 일정을 시간 별로 기록할 수 있고

그 이후로는 자유롭게 메모할 수 있는 모눈종이 형태의 노트가 있다.

 

이것이 그간 까다롭게 굴었던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는 '바로 그' 다이어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올해 들어 일정을 주 단위로 보면서 시간 단위로 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고 그 점에 부합하는 다이어리는 맞다. 내년 상반기를 좀 더 촘촘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물론 머릿속에 넘쳐나는 것들을 기록하기에는 크기가 작은 감이 있다. 따라서 아이디어 노트로 쓰는 노트는 따로 마련해두었다. A5 크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취향에 부합하는 마루망 므네모시네 가로형 스프링노트다. 별생각 없이 편하게 쓰려고 구입한 노트인데 처음 써보고 종이의 느낌이 좋아서 반했다. 


그 외에 내 마음에 드는 점은 아래와 같다.


- 커버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 해지지 않는다.

- 가로 형태로 넘길 수 있어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다(세로 형태는 브레인스토밍하기에 답답함).

- 스프링형태라 앞면뒷면 구분 없이 사용가능하다.

- 상단에 절취선이 있어서 뜯어내기 편하다.

- 따라서 스프링노트를 쓸 때 발생하는 스프링에 종이가 끼이는 현상이 없다.

- 주로 연필과 0.38 이하의 펜촉, 혹은 볼펜 등을 사용하는데 무난하게 써진다. 


내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찾을수록, 한 개인의 취향이란 정말 심오하고 견고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지만 아닌 경우에는 조금의 타협도 없는 취향의 세계. 그 심연을 뚫고 내게로 온 이 다이어리를 앞으로 어떻게 써나갈지 기대된다.


물론 알고 있다. 내년의 다이어리가 온다고 내년의 내가 오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럼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때그때 아무 메모지라도 기록하면서 그 순간의 나를 점쳐 보는 것처럼 새로운 다이어리에 새해의 다짐을 써보고 나 자신을 6개월 동안 믿어보는 행위를 의식적으로나마 하고 싶다. 올해 잘 살면서 월 단위로 살던 인간에서 주 단위로 사는 인간으로 옮겨오고 시간을 더욱 촘촘하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처럼, 앞으로의 기간을 조금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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