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말은 크로스 체크라고 생각할게
오랜만에 가방을 바꿔 들어볼까 싶어 가방 정리를 하다가 손에 잡히는 지갑이 생소해서 놀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면서도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두툼한 장지갑에 현금과 포인트 카드 등 많은 것을 열심히 들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반지갑으로 바뀌었다가 카드지갑이 된 건데 그마저도 번거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지갑엔 든 것도 없다. 신분증과 오티피 카드,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예전 회사의 명함 같은 것들이다.
이 글을 쓰면서 뭐가 더 있는지 확인해 봤는데 퍼스널컬러 진단소에서 받은 컬러칩과 입춘날 절에서 받아온 입춘부,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이 들어 있었다. 카드 지갑으로 바꾸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로또가 사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세 번 접어서 끼워 넣고 다닌 적도 있었으나 그만뒀다. 오만 원짜리를 현금화했을 때 잔돈 넣을 곳이 없어서 번거로웠다. 본격적으로 현금을 안 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다. 혹시 뭔가 사고 싶은데 현금이 없어서 못 산다면 그냥 사지 말자고.
지갑에 든 것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통카드 기능이 탑재된 체크카드 정도였다. 휴대폰(정확히는 아이폰)에 교통카드 탑재 기능이 하루빨리 생기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카드 한 장을 넣어 다닐 휴대폰 케이스를 산 뒤부터 지갑의 쓸모는 더욱 사라져 갔다. 일명 범퍼케이스라 불리는 이 둔탁한 케이스는 아찔한 낙상사고로부터 내 휴대폰을 세 번 정도 살려내서-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깨졌어?- 오랜만에 만난 이에게 “아직도 이거 쓰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서도 이 케이스를 몇 년 더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휴대폰만 있으면 지갑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가운데 지갑의 쓸모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할 만한 사건이 최근 일어났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듯 말 듯한 저녁에 작업실 근처에 새로 생긴 1인 샤부샤부 집에 갔다. 메뉴를 기다리던 중 옆자리에 앉아 있던 커플이 하이볼을 마시고 있었다. 이 집에 하이볼을 파네, 생각만 하곤 실제로 주문해 볼 생각은 못하다가 마침 잘 되었다 싶어 하이볼을 추가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말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퍼포먼스일 뿐, 당연하게도 지갑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되니 하이볼이 더 당겨서 아쉬웠으나, 가서 신분증 가져올게요!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문을 취소했다. 이것 말고도 비슷한 경험은 종종 있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 때 같은 순간들. 어째 죄다 음주 관련이다.
술이야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그런 상황을 겪으면 이런 거 말고 정말 긴급하게 신분증이 필요한 순간이 있으면 어쩌지? 싶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머리로는 구체적인 사례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사건이란 원래 상상력의 범위 밖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만약 신분증이 없다면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하지?
나에게는 신원을 증명하는 카드가 세 장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든 주민등록증, 다른 하나는 십여 년 전 취득한 운전면허증. 다른 하나는 여권이다. 이 세 장의 카드만 있으면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아무개라는 것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이 세 장의 카드가 없다면 다른 여러 자료를 보여주더라도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기 어려울 수 있으려나? 그러나 그런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일단 주민등록증에는 지문을 등록해 두었으니 다시 찾으면 되고, 그걸 기반으로 하나하나 증명해 가면 될 일이다.
예전에 어디선가 봤는데, 영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세 장 중 하나가 없는 셈이다. 내 입장에야 불편해서 어떡하나 싶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살아왔으니 오히려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증이 있는 나라가 갑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친구에게 이 사례를 이야기했더니, 요즘엔 ‘모바일 신분증’이라는 어플이 있어서 그걸 다운로드해두면 신분증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앞으로 생길 수도 있는 신분불증명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플을 깔았다. 정부 기관에서 만든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설치했다. 그러나 어플을 깐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실행은 하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정보들이 쌓여버린 휴대폰에 내 정보를 또 하나 더 추가해 버리기엔 큰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분증이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나를 증명하는 카드라면 그것 말고 내가 나라는 건 본질적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이 필요한가라는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를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나여야 할 텐데.
나는 나랑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나 자신이 가장 낯설고 잘 모르겠다. 거울을 보거나, 남이 찍은 내 사진을 보거나,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거나, 영상 속의 내 모습을 볼 때면 한 프레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모습이 가장 생소하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애틋한 사람을 향해서 물음표를 보낸다.
‘너 누구야?’
내가 이렇게 생겼다니. 내 목소리가 이렇다니. 내가 이런 표정으로 웃는다니. 내가 남의 말을 들을 때 이런 표정을 짓는다니. 미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가장 알고 싶은 만큼 제일 헷갈리는 사람에 대해 모조리 알고 싶은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굴이 안 보이는 CCTV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 OOO 씨가 맞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다른 친구들은 내 걸음걸이나 앉은 자세 같은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나는 “글쎄요” 하며 확신 없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날은 내가 등장하는 별 거 아닌 영상을 한참 돌려보거나, 여러 책들을 낭독한 걸 녹음한 후 들어보며 나를 유심히 살펴본 적도 있었다.
일단은 눈에 띄는 것만 예시로 들었는데, 그 외에 다른 것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몰랐던 새삼스러운 내 모습을 발견하면 놀란다. 이런 건 또 사람들에게 얘기하며 동네방네 떠들어야 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주면 친구가 너 원래 그렇게 해, 몰랐구나라고 대답해 준 적도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나를 자세하게 살펴봐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내가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만 같다. 가깝게는 감정에 대해서도 그렇다. 내가 뭘 할 때 기쁜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싶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이 질문부터 해결해야 한다.
기쁨이란 무엇일까?
‘나의 기쁨’을 나열해 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좋다’는 감각은 뭘까? 그것도 열거해 보기 시작한다. 기쁨이나 호오에 대해 본격적으로 써내려 가다 보면 기쁨과 좋음을 빼놓은 단어들만 생각나서 솔직히 몇 개 못 쓴다. 그렇다면 우선 보류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알아야 할 것은 한도 끝도 없고 머리만 아프지만-지금도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내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안 좋은 모습도 만날 수밖에 없다. 그건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나’를 들여다볼 때 주로 발견된다.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나’ 속에는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모습’이 숨어 있다. 이해가 안 된다기보다는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를 미뤄둔 문제였던 거다.
싫은 부분이 있다면 조금씩 노력해서 바꾸고, 안 된다면 그 또한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나까지 나에게 너무 엄격해지면 슬플 것 같아서 너무 몰아치진 않고 조금씩 방향을 트는 정도로만. 그런 식으로 여러 번 방향을 바꾸어 가다 보면 나중에는 지금보다 나를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중에라도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 하고 생각의 탭을 닫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알고 싶은 욕망과 알아가는 과정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면 한다. 아주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인 나를, 내가 잘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이해해 주겠나 싶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가 없지만 나에게는 내 삶을 제대로 책임지고 살아갈 의무가 있으니까. 싫은 모습조차도 근원에는 분명 다른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삿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나라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