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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Mar 26. 2024

최선을 다해 사부작거리기

흐름에 몸을 맡기되 스스로 헤엄치기를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깨달은 것은, ‘어? 생각보다 오래 다닌 건 아니네?’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 나이 정도 되면 다들 이 정도 연차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나는 그 경력을 한 군데서 오래 쌓은 것뿐. 한 회사에서 일한 경력만 치면 나보다 더 많은 사람도 허다하다. 때문에 일을 그만두던 시점에는 이러이러하니까, 하며 내 상황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며 합리화했지만 회사를 나오고 보니 특별할 것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마음의 갈피에 따라 수렁에 빠졌다가도 이내 잔잔해지면서,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이 또한 회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엔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언제나 직장동료들을 떠나보내는 입장이었던 내가, 떠나는 사람이 되면서 나보다 먼저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회사를 나와 있으면서 회사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걸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는 만큼만 세계를 이해하는 법임을 안다.


막 스무 살이 된 무렵, 친구들을 만나면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친구들을 만나면 대학교 때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서른 살을 경계로 점점 예전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덜 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젊었을 때가 좋았지’라든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라든가 같은 회한의 어조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로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었을 것이므로 가볍게 상상은 할 수 있을지언정 너무 몰입하게 되면 현재를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로 가려고 하는 나와 미래로 가려고 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런 나를 자꾸만 현재에 끌어다 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의 걸음을 제대로 걷지 않으면 과거를 돌아볼 수도, 미래를 내다볼 수도 없을 테니까.


요즘의 나는 ‘최선을 다해 사부작거리는 나’이다. 

사부작대면서 하루에 오 밀리 정도만 나아가는 걸 목표로 한다. 느리더라도 그 정도가 딱 알맞다.

 

오늘 외부업체와 미팅을 하고 나오는 길에 직원분이 물었다.

“에디터님, 프리랜서의 삶은 어때요?”

가벼운 톤이었는데 불쑥 진심이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역시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지 않는 삶은 좀 슬프네요. 그렇지만 평일에 자유로워서 좋아요.”


나는 이곳에서 사부작대다가 이내 저곳으로 사부작댄다. 한쪽으로 가려다가도 자주 방향을 튼다. 하다 말고 자주 방향을 트는 것은 평일에 자유로운 나라서 그렇다. 그래도 무얼 하든 뽀모도로 타이머를 쓰듯 일단 25분 만은 집중하려 한다. 이걸 하다가 내키는 대로 저걸 하더라도, 오 밀리는 갔으니 마음은 가볍다. 한때 추처럼 무겁게 내리누르던 실체 없는 걱정들은 시나브로 흩어진다.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니 걱정이 한 톨도 없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1년 전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추 하나는 덜어낸 것 같다는 점이다.


아이슬란드에 다녀온 뒤로 오랜만에 수영을 하러 갔더니, 생각보다 몸이 너무 무거워 놀랐다. 자유형으로 한 바퀴를 도는데 숨이 턱까지 찼다. 숨이 턱까지 차는 감각은 이제 덜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이를 어쩌나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나 걱정이 앞섰는데 수영 선생님께서 다시 자세를 잡아주셨다.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특히 다리에 힘을 빼고 참방참방 차려고 해 보세요. 물이 크게 튀지 않아도 괜찮고요, 발이 밖으로 많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발 차는 데 힘을 너무 많이 쓰면 금방 지쳐요. 우리 몸이 배터리라고 생각하면서, 초반에 힘을 너무 빨리 소모하지 말자고요.”


그 말을 듣고 다시 수영을 해 보았더니 더 쉽고 빠르게 나아갔다. 스트림라인을 잡고 몸이 매끄럽게 나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열심히 익힌 감각이었는데 방심했던 사이에 다시 굳었던 모양이다. 다리에 힘을 뺄 수 있게 된 후부터 다른 곳의 힘도 뺄 수 있게 됐다. 몸은 수영을 익혔을 때의 감각을 차차 찾아나갔다. 그 감각을 알고 나니 새삼스럽게 팔과 목과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용을 쓰고 있었다니!


큰 흐름에 몸을 맡기되 스스로 헤엄쳐 나아가기를. 

너무 애를 쓰지 말고 너무 느슨해지지 않으면서. 


올해 내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사부작거리면서, 작은 시도에도 기꺼워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지워나가고 싶다. 나의 시간을 귀하게 쓰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생각한 것들을 ‘내일을 향한 환대’라는 제목 아래 조금씩 적어나갔다. 적어야지 생각한 이야기들에 번호를 매기고 옆에 소제목을 써나가니 스물이 조금 안 되는 리스트가 생겼다. 쓰고 보니 두 개가 합쳐진 이야기도 있고 끝내 쓰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글을 쓸 때마다 목록에 취소선을 긋고 나니 이게 마지막 글이다. 마지막 글을 쓰고 나니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도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의식과도 같은 이 일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럼 이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남겨 두고 훌쩍 다른 걸 사부작대러 가야지.


이만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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