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멀리 떠나려니 겁이 나서 예행연습을 해 봤어
아이슬란드 여행을 결정하고 나니, 갈까 말까 갈팡질팡하던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 결정이 어렵지, 마음을 정하고 나면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그렇다. 나아가는 일밖에 없다. 이 당연한 사실 역시 오래 고민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오히려 새로운 추진력도 생겨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간이 남는 김에 겨울 나라 여행을 좀 더 해보고 싶었다.
겨울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까, 겨울을 사랑하는 일에 푹 빠져보고도 싶었다.
올해 나는 마침 시간이 많이 있었고, 하지 않았던 일을 최대한 많이 해보려던 참이었으니까. 해외 항공권 예약이야 다 그렇지만 여름에 예매를 해놓고 겨울까지 기다리는 일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또, 나는 즉흥성이 강한 ‘P’이고 성질도 급해서 미리 예약해 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도 잘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처음 계획한 아이슬란드 멤버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쉽게도 처음에 함께 하기로 한 여섯 명의 인원에서 두 명이 빠지고, 새로운 한 사람이 함께해 총 다섯 명의 인원이 확정된 것이다. 사정상 함께 가지 못 하게 된 친구와 아쉬운 마음을 나누다 “가까운 삿포로라도 다녀올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삿포로야말로 겨울 여행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가까운 곳이고, 아이슬란드의 혹독한 겨울을 선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9시간이나 시차가 있는 머나먼 땅으로 가서 뒤늦게 “아, 맞다!” 하고 깨달으면 너무 늦으니까, 본격적인 짐을 싸기 전에 삿포로에 가서 얼마나 추울지 경험해 보자는 준비성도 발동했다. 사실 조잡한 이유들을 모두 지우고 나면 그냥 나는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다시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가야 할 이유는 넘쳐흘렀다.
삿포로로 떠나기 전에, 가끔 만나 맥주 한두 잔을 마시곤 하는 동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얀 눈이 푹푹 내리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발목까지 눈이 덮이는 거야. 그러면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겠지. 어둠이 짙게 내린 밤에는 노란 조명이 오롯한 이자카야에 들어가서 어묵과 생맥주를 원하는 만큼 홀짝인 다음 고요한 눈길을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걸어야지. 내 속은 뜨끈한 국물과 약간의 취기로 얼큰해지고 바깥의 공기는 차가워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온도가 비로소 맞닿았을 때 나오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면서 빨개진 코끝을 훌쩍이며 숙소로 돌아가는 거야. 숙소에 돌아와서는 입가심으로 하이볼이나 슈하이를 한 캔 마시면서 창밖으로 떨어지는 굵직한 눈송이를 구경하자.
이러한 상상이 두터워질수록 겨울 나라에 대한 환상은 더해져만 갔다.
그렇게 떠난 연초의 삿포로는 상상만큼이나 조용했다.
하얀 눈이 갓길에 높이 쌓여 있었고 길은 얼어 빙판이었다. 많은 것이 상상했던 것과는 어긋났다. 눈은 생각만큼 내리지 않았다. 발이 푹 파묻힐 정도도 아니었고, 예년보다 따뜻했던지 비 같은 싸락눈이 내리기도 했다. 생각한 게 이런 눈은 아니었는데. 나는 우산을 펼쳤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적당한 눈비는 맞으며 걸었다.
새해를 맞이해 많은 가게들의 문이 닫혀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별을 찍어둔 가게들은 대부분 ‘야스미休み’라는 푯말을 걸어둔 채 고요했다. 닫힌 가게 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울적한 마음을 추스르고 단단하게 언 빙판을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걸었다. 아쉬운 마음을 키워가다가 문득, 나도 잘 쉬러 온 형편이니, 야스미를 맞이한 이곳 사람들도 잘 쉬어준 뒤 새로운 해를 맞이하길 바랐다.
반듯하게 구획된 스스키노 거리는 어딜 가나 비슷한 느낌이라서 몇 번이나 돌고 또 돌다 보면 길은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기분에 휩싸여 고개를 들면 위스키를 든 니카상이 우리를 보며 네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알려주었다. 니카상을 좌표 삼아 나의 길을 찾다가, 이자카야를 여러 군데 돌고 비로소 어느 한 곳에 자리 잡고는 가장 먼저 나온 삶은 풋콩을 씹어먹었다.
고대했던 어묵바에는 가지 못했지만 도리야키와 꼬치튀김 집에 갔고, 재즈바와 파르페에 곁들이는 위스키로 공백을 채웠다. 밤늦게 열려 있는 라이브바에서 신년 다짐 쓰기 이벤트에 참여해 올해의 소망을 붓글씨로 쓰기도 했다.
나는 하얀 화선지 위에 검은 먹으로 ‘沒入’이라는 한자를 눌러썼다. 그러곤 깊은 밤, 술기운이 올라 속이 따끈해진 채로 나와서 추운 거리로 나오면 다시 언 길을 친구들에게 의지해 조심조심 걸었다.
오타루에 다녀온 날, 저녁식사로 예약해 둔 징기스칸을 먹으러 가기 전에 우리는 각자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네 명의 일행 중, 같은 호텔을 쓰는 한 친구와 나는 저녁 식사 전에 생맥주 딱 한 잔만 해야지 싶어 가게를 찾아 나섰다.
야스미休み와 만세키満席를 오가며 여러 번 허탕을 치던 중, 친구가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긴 뭘까.”
낯선 간판 속의 글자 하나를 알아본 나는 환희에 차서 외쳤다.
“이 글자(串)면 무조건 꼬치집이야, 들어가자.”
우연히 들어간 곳은 튀김꼬치 집이었다. 하얀 모자와 하얀 옷을 갖춰 입은 나이 든 주방장이 천천히 요리를 만들고 있었고 퇴근길 직장인들이 바 자리에 앉아 곁들임 음식으로 나온 채 썬 양배추를 씹고 있었다.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는 <러브하우스>를 닮은 집수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양송이튀김과 굴튀김을 시킨 뒤 생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왔다. 일본 여행을 할 때는 ‘나마비루 히토츠(생맥주 한 잔)’ 하나만 알면 된다던 누군가의 조언과 ‘추운 겨울날 해 질 녘에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삿포로 맥주와 굴튀김을 주문한다’는 하루키의 문장이 맞닿은 저녁이었다.
따끈한 저녁을 먹고 나온 나의 든든한 속내와 겹겹이 차가워지는 바깥의 온도 차가 맞닿는 이런 이른 밤,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끼면서 걸어가는 기분은 여행 전 상상했던 장면 중 하나와 꽤 흡사했다. 나는 친구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 여행에서 소망했던 일이 하나 완성되었다며 깔깔 기분 좋게 웃었다.
겨울 나라에서 돌아온 후 나는 오타루에서 사 온 술사탕을 한 알씩 아껴 먹었다. 조그만 사탕은 얇은 설탕막이 치아에 닿는 순간 표면은 파스스 부서져 내리면서, 그 안에서 흐르는 소량의 위스키 향기가 혀끝에 느껴진다. 한 통에 여러 가지 맛이 있는데 각각의 맛을 느끼려면 꽤 집중해야 한다. 녹아내리는 순간 흡하며 코로 향을 맡아야 한다. 술은 술인데 술은 아닌 것만 같다.
삿포로에선 기대했던 만큼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길은 꽁꽁 얼어 있어서 나와 친구들은 옆구리에 팔을 꼭 붙인 채 미끄러지지 않으려 서로를 붙잡아주었다. 하나가 삐끗하면 모두가 넘어지겠지만, 그렇게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일으켜 세우는 쪽으로 무게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여름 나라에선 보통 제각각 떨어진 채 팔을 휘적이며 걸어가니까, 이 거리감이 낯설으면서도 퍽 다정했다.
내 앞에서 종종걸음 하며 걷던 일행들의 뒷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방한모자에 감싸인 뒷모습들은 알사탕처럼 동그랗고 귀여웠다. 알사탕들을 따라서 미로 같던 스스키노 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하던 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겨울 나라의 오롯한 풍경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주말엔 발이 푹푹 빠질 듯한 폭설이 내렸다. 눈의 나라에서보다 더 큰 눈이 쌓이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눈을 마음껏 보기 위해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렸지만, 진정한 눈의 나라는 우리나라인데, 하며 농담을 나누었다. 평소의 여행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꼭 같았던 몇몇의 장면들. 새로운 장면들 속에 나를 그저 데려다 두었던 날들과 어떤 엇박자를 느끼며 토끼처럼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 보던 날들.
아이슬란드에서는 나는 또 어떤 장면들과 만나게 될까. 삿포로 여행을 다녀온 덕분에 아이슬란드에 가져가려던 몇몇 짐은 덜어내고 몇몇 짐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무리해서 무장할 필요도 없지만 염려되는 마음을 애써 버릴 필요도 없다. 나는 창고에서 캐리어를 꺼내 들고 크기를 가늠하며 다음 겨울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삿포로
일본 홋카이도 지방에 위치한 도시이다. 눈이 많이 내리며 2월에는 삿포로 눈축제가 열려 순백의 겨울 풍경을 볼 수 있다. 여름에는 보랏빛 라벤더 꽃밭이 아름답다고 한다. 인근의 오타루시는 영화 <러브레터> <윤희에게> 등의 배경지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