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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Oct 21. 2024

추운 게 싫어서 겨울 나라로 갔다

어떻게 여행이 시작됐는지 들려줄게

왜 여름에는 겨울이, 겨울에는 여름이 그리울까. 


지난해 여름 한가운데를 지날 때, 나는 준비한 것처럼 겨울이 그리워졌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났고 바깥에 조금만 나와 있어도 차오르는 눅눅함에 숨이 가빴다. 청량함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동네 수영장으로 달려가 자유수영을 하며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무언가 부족한 기분에 자주 휩싸였다.


사계절 가운데 봄의 끝자락과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를 가장 사랑한다. 한여름도 괜찮다. 추운 건 못 참아도 더운 건 무던하게 잘 참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번 여름이 그렇게 지독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3월에 태국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봄이 오는 걸 순차적으로 느낄 새도 없이 여름에 먼저 발을 담갔고, 돌아와 보니 이미 시작되어 있는 여름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여름을 아주 오래 보내다 보니 하얀 겨울 나라에 대한 낯선 환상이 덧입혀지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않고 지펴두기만 한 잔잔한 불씨에 연료를 부은 것은 친구의 SNS 게시글이었다. 친구 역시 여름을 가장 사랑하는 이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그 애 역시 반대편의 서늘함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SNS에 계속해서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사진을 업로드하며 팔랑귀인 나를 설레게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이슬란드에 오로라 보러 갈 사람?” 하고 함께 여행을 떠날 사람을 모집하기도 했다.


겉으로 티를 안 냈지만 나는 “나도, 나도!” 하면서 속으로 꾸준히 하트를 날렸다. 우리는 작업실을 같이 쓰는, 매일같이 만나는 사이였음에도 그 애 앞에서 “나도, 나도!”를 입 밖으로 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내 마음이 아이슬란드로 훅 기우는 것을 염려한 탓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맞이하는 오로라 사진들 덕분에 내 마음에는 결국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추운 걸 싫어한다. 그냥 싫어한다고 하면 진심이 안 와닿을 것 같아, 아주 질색한다고 다시 말해본다. 일찍이 온돌 난방을 개발한 한국인의 후손답게 바닥 뜨끈한 곳에서 몸을 지지는 게 좋고, 코로나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목욕탕에 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지 못한 점이다. 이솝우화의 <북풍과 태양>에 나오는 나그네가 나였다면 아무리 태양이 내리쬐도 외투를 벗지 않았을 테니, 태양과 북풍은 박빙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몇 년 전 낙상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진 후에는 빙판길에 대한 공포감이 은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눈 오는 풍경은 아늑한 실내에서 바라볼 때만 좋고, 눈사람을 좋아하지만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하는 것만 좋아한다. 겨울의 난방비는 끔찍하지만 추위에 떨며 잠드는 건 더 무서우므로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넉넉한 난방비만은 비상금처럼 사수하려 한다. 


그럼에도 겨울이 좋은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유난히 밤이 어두워지는 계절, 선술집에서 국물안주와 곁들인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와 내 속의 온도와 바깥의 기온차를 느끼며 숨을 내뱉는 순간, 내 입김이 만드는 몽글몽글한 연기를 보는 순간. 그때뿐이다.


이렇듯 추위보다는 더위를 더 사랑하는 나이지만, 아이슬란드 사진을 보면서 오로라 사진을 보면서 왠지, 예전부터 추운 걸 좋아했던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나라에서 패딩을 여미고 오들오들 떨면서 오로라를 기다리는 낭만 같은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 같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왠지 겨울을 싫어하는 나일수록 더더욱 제대로 겨울나라를 여행해 보며 이 겨울을 정면으로 마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호승심도 일었다. 


마음이 기울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만든다. 그런 식으로 피해 왔던 겨울을 제대로 마주해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발끝이 곱아들고 코끝이 발개진 채로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햇팩에 의지해 투명한 콧물이 줄줄 흘리며 텀블러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고, 아이슬란드의 까만 하늘이 만들어내는 파랗고 초록빛의 향연을 보는 것. 그런 장면은 머릿속에서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본격적으로 아이슬란드 원정에 함께할 파티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마음이 크게 부풀어 있던 것과는 반대로 그 권유에 힘껏 응하지는 못했다. 괜스런 고민들이 시작된 것이다. ‘가야 할 이유’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에 바빴다. 


자연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잖아? 

오로라는 사진이 더 예쁠지도 몰라. 

굳이 유럽까지 가서 오로라만 보고 온다고? 


그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마음을 다시 한번 저울질했다. 고민하던 중에도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여름은 계속 무더워졌고 나는 머릿속에 차가운 겨울 풍경을 그렸으며 친구가 홀로 원정대 모집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주변에는 어느덧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어 네 명의 인원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하는 생각 그대로를 머릿속에 옮기며 파티원 모집에 신청서를 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가 보겠어.”


그렇게 말한 뒤 항공권을 발권한 뒤에는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모든 게 결정되고 난 후 나는 차분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지금 일어난 사실을 곱씹듯 새로운 다짐을 마음 한편에 기록했다.


나는 다가오는 겨울에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를 볼 것이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오로라를 기다리고,

따뜻한 커피 혹은 온더록 보드카를 홀짝이면서 아이슬란드의 까만 하늘이 만들어내는 파랗고 초록빛의 향연을 두 눈으로 마주할 것이다, 하고.




아이슬란드

대서양 북부의 북극권 남쪽에 위치한 화산섬으로 그린란드와 영국, 아일랜드 사이에 위치해 있다. 

밤하늘의 오로라와 피오르드, 빙하와 폭포, 온천 등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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