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고 덜어내고 덜어내려 해도 마지막까지 뺄 수 없는 게 있어
삿포로 여행까지 다녀오니, 정말 아이슬란드 여행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착 후 실제 일정은 총 8박 9일이었고, 앞뒤로 비행기를 타느라 쓰는 날짜까지 합하면 10박 11일간의 여행이 될 것이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 다녀온 태국 여행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떠나는 긴 여행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정말 오랜만.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왠지 긴장되는 마음에 <꽃보다 청춘 - 아이슬란드 편>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여행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아볼수록 내 마음을 내리누르는 단 한 가지는 바로 “비싼 물가”였다.
TV 출연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하하하 웃으며 물건을 집어들었다간 아이슬란드의 물가에 놀라 물건을 내려놓았고, 그들이 안심하며 맛있게 먹는 음식은 핫도그가 유일했던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도 입을 모아 아이슬란드의 ‘미친’ 물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슬란드는 물가가 높으며 특히 음식점에서 사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식재료 마트에서 음식을 사다가 요리해 먹으라는 조언을 맨 앞에 두었다.
‘아이슬란드 여행 짐 싸기’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컵라면과 간편 요리, 김치를 비롯한 반찬을 캐리어에 오밀조밀하게 테트리스하듯 싸는 다양한 스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8박 9일의 여행 동안 저렇게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는다고? 의심하면서도 추운 나라에서는 숨쉬는 것만으로도 열량을 소비하니 금세 배가 고파지곤 하니까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고.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갈팡질팡했다. 나는 돈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퇴사 후 갭이어를 위해 모아둔 자금을 탈탈 털어 떠나는 여행이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결심하건대, 준비 없이 떠난 여행에서 어이없이 큰 지출을 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MBTI의 알파벳 가운데 지독한 P 성향을 갖고 있다. 이 말인즉슨, 계획을 면밀히 짜지 않고 즉흥적이며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원래 여행을 떠날 때 짐을 많이 챙기지 않는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며 일행과 각자 캐리어를 올려 무게를 잴 때마다 “너 짐이 왜 이렇게 가벼워?” 하는 이야기를 매번 듣는다. 챙긴다고 챙기고 게다가 걱정되는 마음에 더 챙겨 넣었는데도 이상하게 무게가 별로 안 나온다.
그래서 캐리어 역시 가까운 곳에 가든 먼 곳에 가든 3박 4일을 가든, 14박 15일을 가든 24인치 캐리어 하나가 고정이었다. 10년을 넘게 들고 다닌 이 캐리어는 동생이 대학교 교환학생을 떠나던 시절 구입한 아메리칸 투어리스트 24인치로, 나는 그거 하나로 이탈리아도, 동유럽도, 파리도 떠났다. 십여 년을 넘게 들고 다녔는데도 아직도 멀쩡해서(라고 했더니 누군가는 ‘아냐, 전혀 멀쩡하지 않아, 바퀴가 전혀 안 굴러가잖아’라고 했지만, 그래서 힘으로 돌파하며 끌고 가고 있긴 하지만...),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 또 떠날지 모르는 겨울 여행을 위해 더 큰 캐리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미지의 강행군을 위해 완벽한 체력을 만들어야 하고 완벽하게 짐을 싸야 하고 컨디션을 완벽하게 끌어올려서 가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거실 한구석에 그 24인치 캐리어를 열어놓고 생각날 때마다 필요한 물건을 집어넣었다. 간단한 옷을 방한용품을 양말을 등산화를, 아이젠 털모자와 털장갑을, 방수장갑과 방한마스크와 귀도리모자와 캡모자, 각종 생활용품과 식재료 등등을.
그런 와중에도 함께 여행을 가는 친구는 종종 어딘가에서 새로운 물품을 알아내 “이것도 필요하대, 꿀팁이야, 꼭 챙겨” 하며 알려주었다. 그러면 나는 멍하니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 물건을 챙겨 넣곤 했다. 그렇게 단단히 벼르며 1월의 몇 주를 보내고 난 뒤, 나는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게 짐을 쌓아두던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안에 무언가가 푸시시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많은 걱정을 껴안고 있는 것 아닌가? 나답지 않다.
거실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짐들이 내 걱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 여행이 완벽한 여행이 될지 아닌지는 실제로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는 완벽의 형태 또한 불완전하기 않은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부족하고 조금 아쉽더라도 내 마음만은 그걸 제대로 흡수할 수 있게끔, 그 정도의 깨끗한 마음 하나만 준비해 가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후로는 생각날 때마다 한쪽 벽에 쌓아둔 물건들을 덜어내는 연습을 했다. 내복도 이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을 것이고 겉옷도 마찬가지. 방한모자, 목도리, 장갑은 일단 하나씩만 챙기자. 삿포로에 갔을 때 생각만큼 춥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너무 많이 챙겨가는 것도 과유불급일 것이다.
하나가 꼭 필요한 물건은 일단 하나를 챙기고 두 개째부터는 숙고하자. 그러면서 짐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24인치 캐리어 안에 10일 치 여행의 짐이 다 들어갔다. 마지막엔 조그만 기내용 캐리어를 추가로 더 챙겼다. 사실 이건 챙기지 않아도 괜찮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긴 것으로, 내 조급한 마음을 담을 용도였다.
불안함을 위한 여백.
마음 저 아래에 도사리는 나의 불안을 위하여 이 정도 귀찮음만은 감당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제 공항에 와서 무게를 재 보자 내 짐이 가장 가벼워서 다소 당황했지만, 다른 일행들은 아이슬란드 이후에도 다른 여행을 이어갈 사람들이었으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챙긴 걸까? 여행을 떠나기 전 수런거리던 마음은 막상 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 바람과 함께 훌훌 날아가버렸다. 일단 비행기는 떴으니 돌이킬 수 없다. 내게 믿을 건 여행자보험뿐.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24인치 캐리어
짧은 여행은 20인치 캐리어, 긴 여행은 24인치 캐리어로 통일하다가 언젠가부터 국내여행은 20인치, 해외여행은 24인치로 통일하고 있다. 쇼핑목록이 늘어남에 따라 캐리어 크기가 커져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고 고민하지만, 내가 컨트롤하며 끌고 다닐 수 있는 캐리어의 크기는 24인치가 적당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곤 한다. 그 외에는 사이드 가방을 이용하기로. 여행을 준비할 때면 늘 되새긴다. 욕심부리지 말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만 들고 다니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