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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Oct 25. 2024

하얀 것들엔 종종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하얀색을 좋아하는 당신, 하얀색을 좋아하시는군요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가요?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한동안 가장 먼저 말했던 색은 노란색이었다. 색채의 세계는 아주 심오해서 노랑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노랑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노랑과 안 좋아하는 노랑, 그저그런 노랑 사이에서 내가 사랑하는 색을 고르는 일은 제법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걸 고르는 재미마저 포함할 정도로 나는 노랑에 푹 빠져 있었다.


색깔은 사람의 심리에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가보다. 심리테스트가 따로 있어, 그때그때 선택한 색깔에 따라 현재 마음 상태를 알려준다는 말도 있으니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PT선생님께서 알파벳이 적힌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자를 눈앞에 보여주며 어떤 색깔이 글씨를 읽기에 편한지 물어본 뒤 그것에 따라서 할 만한 운동을 진행해주기도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색깔은 인간의 심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겠거니 지레짐작할 뿐이다. 


왜 노란색을 좋아하는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노란색은 예쁘니까, 게다가 난색 계열 중에서도 뉴트럴한 느낌을 주면서 또 다른 색보다 좀더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이유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좋아하는 일은 대부분 그렇듯이, 먼저 좋아한 후에야 나중에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회사를 그만 둔 뒤 야외활동을 더 많이 하면서부터는 초록이나 파란색 같은 한색 계열의 쨍한 색에 좀더 마음이 갔다. 쨍하고 시원한 색. 인공눈물을 들이붓는 것 같은 높은 채도의 색상일수록 탁 트인 느낌이라 한없이 시원해졌다.


그러나 색깔에 대한 호오와 관계없이 내가 오래도록 가까이 해 온 색은 흰색이다.


빈문서.hwp를 필두로 하여, 하얀 백색에 무언가를 채워넣는 일이 주로 내가 해온 일이었으니까. 하얀 쌀밥을 먹고 하얀 종이 혹은 빈문서.hwp 같은 백색 화면에 앞으로 만들어나갈 것을 적어넣는 일들. 그것은 일이 진행되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더해 함께 채워 넣겠지만, 내가 스스로 처음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백색의 빈문서에 문장을 채워넣으며 내 상상을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일들이 백지에서 시작됐다. 

눈에도 손에도 잡히지 않는 여러 실체들이 있어도 결국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잡아다 백지에 형태로서 채워넣어야 했다. 나는 늘 백색의 가능성을 사랑했고, 여러 가지 색깔로 채워넣는 일 또한 설렜다.


때문에 아이슬란드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하얀 설경들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채워넣는다는 가능성에서 동질감을 느꼈지만, 길을 달리면 달릴 수록 이 하양은 내가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백색은 채워넣기 전의 '빈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들을 잠시 덮어둔 담요 같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자연이 겨우내 쉬어가는 시간을 하얗고 커다란 힘으로 덮어둔 것. 그런 흰색었다.


원래는 초록이고 파랑이고 또 흙빛 대지였을 공간. 대지의 활력은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동안 잠시 하얀 이불을 덮고 있다. 우리는 자연이 깨지 않게 조용히 그 옆을 지나간다. 아이슬란드는 겨울뿐 아니라 봄여름의 풍경도 매우 아름답다고 하던데, 아마 이 계절이 지나고 나면 다시 흰 것들을 비집고 나와 약동할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놓은 듯한 하얀 풍경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그 동안 눈을 찌르는 색채와 수런거리는 굴곡에 아주 많이 시달려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형체 없는 침잠과 고요가 마음에 든 것이다. 눈을 찌를듯이 뻗어나가지 않고, 그저 얼마나 더 하얀지 얼마나 덜 하얀지 정도를 겨우 나타내주는 명암, 하늘에서부터 쏟아져내리는 하얀 파랑들. 여러 건물들과 구획으로 나누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뻗어나가기만 할 것 같은 확장성. 가끔 시선의 옆에서 어렴풋이 스미는 햇살과 노을은 은은하고 연한 노란색이나 분홍색 혹은 쪽빛으로 하늘을 물들여 놓을 뿐이었다.


점층적으로 내려앉는 밤의 풍경에 잠시잠깐 눈길을 돌리고 나면 곧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따라 떠다니는 오로라 무리를 좇기도 했다. 초록을, 빨강을, 파랑을 은은한 색채를 모두 한 겹 한 겹 눈 안에 담고 싶었다.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건 좋았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니며 신나게 떠들고, 저녁을 차려먹기 위해 왁자지껄 하고, 맥주를 마시고 깔깔거리면서도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가 자연을 맞닥뜨릴 때면 언제나 객인 것처럼 겸손해졌다.


'잠깐 다녀갑니다. 지치고 혼란한 마음을 잠시 눌러 두려고요.'


하고는 고요하게 아이슬란드가 보여주는 풍경을 만끽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가장 고요하고 환한 풍경은 '키르큐펠'이었다. 

463미터 정도로 높지 않은 이 산은, 끝부분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생겨 있었고 그 독특한 모습 때문인지 사진이 정말 많이 찍힌 산이라고 한다. 이 산이 특히 멋있는 점은, 주변에 펼쳐진 평평한 대지 탓일 테다. 

산의 반대편으로 가 조금 지대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한 프레임에 큰 산과 평지가 함께 찍히는데 그게 참 평온하다. 산 옆에는 해안, 그 너머로 천천히 해가 진다. 해가 저물어가며 여러 색채를 만들어내던 일몰의 풍경.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아주 오래 멈춰 있었다.


해질 무렵에 도착해서인지 해가 저무는 순간까지 모두 눈에 담고 싶었다. 그렇게 하자고 마음 먹은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누구도 먼저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씨마저도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는 듯 참 적당했다. 바람이 크게 불지도 않고 귀가 떨어져 나갈듯이 춥지도 않은 채 그저 해가 지고 있을 뿐인 정적인 시간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저마다 무리 지어 돌아다녀도 그저 소품이 될 뿐인 풍경들. 나도 그들 속에 섞여 함께 아주 작아졌고 또 소품처럼 돌아다녔다. 


화면을 가까이 들이대면 우리는 분명 깔깔 웃고 있었고 미끄덩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용캐 애를 썼었고, 절벽 어딘가에 앉아 사진을 찍었고, 저마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 우리 혹은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로 올라가 사람들을 내리찍으면 조그맣게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이 퍽 쓸쓸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그렇게 보였을 테다.


해가 저물고 하늘의 푸른색이 더 짙어질 때쯤 조금씩 바람이 세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떠나는 사이에도 커다란 산은 그대로 거기에 버티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는 것과 사람들이 떠나는 것에 관계없이. 있는 자리에 그대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또한 퍽 스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정적인 그 풍경은 가끔 내 자세를 고쳐 잡게 한다.


요즘도 가끔 마음이 수런거리거나 걱정거리가 생겨나면 키르큐펠에서 찍은 이 평온한 풍경을 바라본다. 모든 일은 가까이서 톺아보면 큰 소란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관전하면 이렇듯 평온하다. 하얀 이불보를 덮고 있는 것처럼 겹이 생긴다. 때로는 채워넣는 하양보다, 덮어주는 하양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 풍경. 

우주의 먼지나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까지 갈 일도 없다. 그저 이 장면 하나면 된다. 



키르큐펠

아이슬란드의 산 중에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인플루언서 산'이라고 한다. 드라마 <왕자의 게임>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고. '교회를 닮은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아이스크림 같기도 하고 고깔모자 같기도 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근처에는 키르큐펠포스라는 폭포가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땐 폭포 표면이 얼어 있어서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경험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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