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에서 시작된 여행은 오로라 호텔에서 끝난다
겨울 나라를 생각하면 추위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 대착점에 있는 온기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아이슬란드는 화산섬인 만큼 온천 관광지로도 유명해서, 우리도 여행 중 두 곳의 온천에 들렀다.
바로 시크릿라군과 블루라군이었다.
연말 송년회에서 내년 초에 아이슬란드 여행을 간다고 말하자 한 선배가 “거기 화산 폭발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아?”라며 걱정해 주었다. 아이슬란드에 가겠다고 예약해 둔 것이 여름이었고 두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정작 여행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야 찾아보니 화산 폭발에 관한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이곳저곳 문의를 해본 결과 여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곤 안심했다. 그러나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마지막 일정인 블루라군이 화산 폭발로 인해 폐쇄되었으므로 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블루라군은 우리가 여행을 기다리며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였다. 푸른빛의 온천수가 일렁이는 아이슬란드 최대 규모의 온천, 미네랄이 풍부한 매끈한 온천수, 여행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줄 마지막 여정. 사진으로 봤을 때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였으니 실제로 가 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또,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비교적 조그만 온천인 시크릿라군에서 만족스럽게 온천을 즐기고 나니 블루라군의 규모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땐 크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폐쇄된 상황이고 조만간 재개장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행 마지막 일정이니 다른 곳을 여행하는 중에 상황 변화가 생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폐쇄되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곳을 추가로 예약하지 않고 블루라군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동쪽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올 때는 한 번 봤다고 익숙하고 반가운 풍경이 보였다. 빨간 지붕들이 인상적인 비크 마을과 멀리 보이는 목장들, 지난번에 들른 곳과 같은 체인의 마트 등. 일주일 남짓 머물렀다고 이 나라가 사뭇 정겹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루라군의 일정을 다시 확인하는데, 오늘부터 다시 온천이 개장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와아. 너무 잘됐다!
멀리까지 왔는데 보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보고 돌아가고 싶었던 나는 반가움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여행을 하는 동안 쌓인 피로를 그곳에서 풀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블루라군 근처까지 왔을 때는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참 이동하던 차량이 갑자기 정체되기 시작했다. 블루라군 근처로 들어가는 길은 경비가 삼엄했고, 우리는 들어가기 전에 출입기록을 작성해야 했다.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찍으려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고 대피 인원을 파악하지 못했을 경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이렇듯 출입 상황을 확인하는 듯했다. SNS에 관련 내용을 검색해 보니 과연 그 장면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진사들도 있는 듯했다.
차량이 줄이어 서 있었지만, 한 대 한 대 출입 인원 확인을 마친 후 들어갈 수 있었다.
온천으로 가는 길의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능선으로는 화산이 폭발하며 흘러넘친 용암길이 까맣게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까맣고 커다란 화산길은 어느 날, 깜짝 놀랄 소식을 듣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을 마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일까, 블루라군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관광지답게 방금 지나온 장면과는 대조적인 관광지만의 분위기가 더 확연히 드러났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관광버스들을 비롯해 수많은 차량들. 미로를 들어가는 듯이 조성된 입구와 안으로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사람들. 정말 블루라군은 지난번 들렀던 시크릿라군보다 훨씬 큰 온천이었다.
우리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키를 받아 들고 수건을 챙기고 샤워를 한 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린 채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에메랄드 빛 온천이 커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다랬다. 온천 안으로 들어서자 발바닥에 보드라운 모래 같은 것이 밟혔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다들 웰컴 드링크로 나누어주는 음료를 들고, 얼굴에 하얀 팩을 칠할 채 동동 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기본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는 구성 같았다.
나도 발끝으로 바닥을 치듯 동동 떠서 가운데 팩을 나누어주는 사람에게로 가 보았다. 그에게 팔찌를 보여주니 주걱으로 하얀 실리카 팩을 한가득 떠 내 손에 얹어 주었다. 그런 뒤 그걸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에 슥슥 펴서 발랐다. 다 바르고도 남아서 목에도 바르고 팔에도 발랐다. 부들부들한 점성이 왠지 발끝에서 느껴지는 모래라고 생각한 입자와 같은 것인 듯했다.
온몸이 따끈해지는 물에 몸을 담그며 옆으로는 화산암에서 뿌연 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자연 속의 노천 온천인 셈이었다. 우리는 이끝에서 저 끝까지 헤엄쳐 다니거나 사진을 찍거나 배영을 하는 등 온천을 즐기고 간혹 사우나 시설로 들어가 땀을 뺀 뒤 온천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물에 오래 있어 발그레진 얼굴과 온천수에 젖어 빳빳해진 머리카락을 빗으며 라운지에 앉아 있자니 또다시 날이 저물고 있었다. 노곤해진 상태로 차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나는 아이슬란드를 떠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워져서 떠나기 싫은 마음을 끌어안고 온천 내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그간 여행 중에는 숙소에서 직접 끼니를 만들어 먹었고 사 먹어봐야 푸드트럭의 간단한 음식들이었기 때문에, 여행 첫날 레이캬비크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꼬치 요리 이후로 맞이하는 두 번째 만찬이었다. 식전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차례로 나오는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며 우리는 여행 일정을 마무리했다. 들어올 때는 커다란 통유리창에 파란 온천의 모습이 보였는데, 나올 때쯤엔 완전히 깜깜해져서 식당을 나가는 우리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시 차를 타고 공항 근처로 이동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물 숙소인 ‘오로라 호텔’은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바로 근처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므로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같이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면 될 거였다. 여행을 함께 한 우리들도 각자의 일정에 따라 헤어질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는 친구와 방을 같이 썼고, 유럽으로 이동해 여행을 이어갈 친구들도 각자의 일정에 맞게 방을 배정했다. 여행에 집중하느라 캐리어 무게의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것저것 산 것들을 챙기고 나니 캐리어는 금세 무거워졌다.
마트에서 장 보고 남은 사과를 먹으며 마지막 짐을 다 챙기고 나니 어느덧 잘 시간이었다.
여행을 오면 늘 그렇지만 특히 다음날 이른 아침 비행기일 때는 잠이 깊이 들지 않는다. 그날 역시 뒤척였고 잠시 눈을 붙일 정도로 누웠다 일어나니 공항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케플라비크 국제공항은 아이슬란드 여행을 끝낸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이동하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사람들이 넘치도록 많았고 끝없이 줄이 늘어서 있었다. 허술한 나와 친구의 움직임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걱정되는 듯 계속 힐끔거렸다. 그들은 캐리어 줄을 찾지 못한 우리를, 짐 붙이는 것이 서투른 우리를 슬쩍슬쩍 도와주었고, 덕분에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인 핀란드 헬싱키의 반타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환승 시간을 보내는 동안은 또 다른 여행을 온 것처럼 식사를 하고 면세구역을 돌아다니며 보냈다. 여행 오는 길에는 빨리 비행기를 갈아 타러 가기 바빠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특히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는 나라라 그런지 해가 바뀌었음에도 공항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2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크리스마스를 다시 맞이하는 기분으로 홀린 듯이 초콜릿을 사고 기념 자석을 샀다. 크리스마스 하면 왜 초콜릿이 먼저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마지막으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난 후에야 이 여행이 이제 정말로 끝을 맞이했다는 게 실감 났다. 11시간이 넘는 비행을 끝나고 나면 다시 일상일 것이다. 끝없는 여행을 하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집으로 가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먼저 짐을 챙기고 밀린 빨래를 해야지. 사진을 정리하고, 더 먼 곳으로 가 새로운 여행 이야기를 가져올 친구들을 기다려야지.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떠밀려가는 마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를 다녀갔던 오로라는 오로라의 여행을 떠났고 나는 이제부터 내 삶의 여행을 떠날 차례다.
그렇게 저마다의 길을 가던 우리가 어느 순간에 다시 맞닿기를 바라면서.
블루라군
Blue Lagoon. 아이슬란드 남서부 그린다비크 근처에 위치한 온천으로 푸른 온천수가 검은 화산암에 둘러 싸여 있으며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온천이다. 이곳의 온천수에는 미네랄이 풍부하고 실리카와 소금과 천연 광물 등이 포함되어 있어 피부에 좋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