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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Feb 13. 2023

비로소 깨끗해진 마음으로 2

1인 세신숍 방문기

다른 때와는 달리 바로 온라인 예약을 실행했다. ‘내가 목욕탕에 가지 못하는 이유’ 목록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고 예상되는 단점은 경험이라는 장점으로 상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셈해보았을 때, 목욕탕 입장료와 세신비, 만약 한다면 추가될 샴푸 비용을 포함했을 때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예약 버튼을 누르자 새벽이었는데도 바로 안내 문자가 왔고 예약금을 입금하자 바로 확정되었다.


새벽에 예약을 마치고 그날 아침 바로 방문을 할 수 있다니.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예약 시스템 너머에는 분명 늦은 시간까지 잠 못 이루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겠으나 모든 것이 AI의 주도하게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예약금도 냈겠다, 이제는 백스텝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날은 드물게 깊은 잠을 잤다.


아침이 되자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해둔 대로 버스를 타고 세신숍으로 향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어떤 장소에 처음 가기 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상상해보는 습관이 있다. 상상은 거듭할수록 고난의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가곤 해서, 열몇 번째로 회귀한 상상 속 나는 어느덧 극한의 상황에 단련된 전사가 되어 있다. 이상하게도 이런 상상을 마치고 나면 새로운 장소에서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그럭저럭 괜찮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용기도 생겼다.


미로 같은 아파트 상가를 지나 숍 문 앞에 도착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고 하면 좋았겠으나, 이미 블로그 후기들을 통해 그곳의 인테리어와 상황을 대충 짐작했던 터라 태연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내 기척에 세신사가 나오면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신 분? 성함이?”


예약을 확인하고 추가금을 결제한 뒤, 나는 세신사의 안내에 따라 커튼 장막 너머의 ‘그 장소’로 향하는 중간계에 들어섰다. 그곳은 마사지숍이나 피부과나 미용실 등의 탈의실과 비슷했다. 탈의실에서 탈의한 후 목욕탕에 들어서자, 작은 욕조와 내가 세신을 할 침대가 보였다. 목욕탕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10분의 1 정도로 압축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도 있어야 할 것은 야무지게 놓여 있었다. 미리 안내받은 대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몸이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세신사가 내가 부탁한 차가운 차를 내어주었다. 차를 마시고, 몸은 뜨겁고 속은 차가운 상태로 따순 물에 푹푹 몸을 담갔다.

물이 좀 식었다 싶었을 때는 더운물을 좀 더 틀었다. 따뜻했고 아늑했고 나는 익어갔다.


침묵이 흘렀다. 욕조 속의 침묵. 얼마나 흘렀을까 고개를 드니, 마침 눈앞에 바로 동그란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이래서 그 위치에 둔 걸까). 십 분이 지나면 세신사가 들어오겠군, 생각하며 늘 하던 상념에 잠기려 노력해보았으나 평소 목욕탕에서 습관처럼 즐겼던 상념까지 치닫지는 못했다. 공간이 10분의 1 정도로 줄었으므로 상념의 바닥 또한 10분의 1 정도 얕아졌을 것이다. 목욕탕의 커다란 탕이 내뿜어내는 거대한 습기가 상념 형성에 어느 정도 일조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작은 욕조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는 욕탕에서 마주하는 뿌연 세계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세신사가 들어왔다. 세신사는 철제 침대 위에 누우라고 알려주었고, 전문가의 무브에 몸을 맡긴 채 나는 때를 밀‘렸’다. 전문가답게 그는 그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 번째 루틴은 때가 미는 데에 방해되지 않게 내 머리카락들을 정리해주는 일이었다. 먼저 얼굴에 팩을 한 장 얹고, 몸에는 따뜻한 물에 적신 스팀 타올을 올려주었다. 몸이 데워지는 동안 그만의 준비를 마친 후(참방참방 물소리가 꽤 오래 들렸다), 다리부터 때를 밀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돌아누우세요.”

“오른쪽으로요.”

“다리를 들어볼게요.”

“몸을 모로 세워볼게요.”


세신사의 주문과 보조에 맞춰 우리는 1시간 가까이 때를 밀었다. 돌아누울 때마다 나는 옆에 떨어진 나의 흔적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양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욕조에 잠시 몸을 담근 정도로도 이 정도 양의 때가 나오는구나. 묵은 각질보다는 때비누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때를 너무 많이 묵혔구나(내가 너를 끌어안고 살았구나)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에서 시작해 머리에서 끝나는 것이 순서인 것인지, 때를 다 밀고 난 후 세신사는 머리를 감겨주었다.

 

때를 미는 동안 침묵 속에 젖어 있던 나는 문득 궁금한 것들을 드문드문 물어봤다. 정적도 소란도 아닌 대화가 작은 공간 속에 요요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간 목욕탕을 방문하지 못해 어려웠던 나의 사정과 내가 방문하지 못한 사이 있었을 목욕탕의 운영 사정,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이 어느 지역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는지 등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펜데믹을 지나는 동안 얼굴 모를 사람들의 면면들이 피부로 와닿았다. 목욕탕에 못 가서 힘들었던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거야, 다들 슬퍼하고 있었던 거야, 하는 묘한 동지애마저 생겼다.

머리를 감은 뒤, 세신사가 어지러워진 공간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가볍게 샤워를 마쳤다. 모든 것이 끝났다. 처음에 한 일들의 역순으로, 몸을 닦고 탈의실로 나와 보디로션을 찹찹 바른 뒤 옷을 갈아입고 살짝 노곤해진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간이 화장대가 있었고 드라이어도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면봉과 화장 솜이 놓여 있었다. 친근한 풍경에 나도 미리 가지고 온 스킨케어 용품을 꺼내는 것으로 익숙한 그림을 덧댔다. 머리를 말리고 양말을 신고, 마지막 정리를 마친 뒤 세신숍을 나셨다.

어느덧 눅진해진 몸 위로 아직 따끈한 두피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쳤다. 시원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 또한 처음이었다. 지난밤의 상상 속에서 세신숍을 나와서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은 없었으니까. 버스에서 내리자 허기가 져서, 요깃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수를 들이켠 뒤, 퉁퉁 불은 손으로 마찬가지로 퉁퉁 불은 손발톱을 정리했다. 말랑말랑해진 손발톱이 부드럽게 깎였다. 때를 밀고 싶어 목욕탕을 찾다가, 목욕탕에는 가지 못하고 세신숍에 방문하고 온 것이 낯선 경험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정도로 때를 밀고 싶었던 걸까? 하는 가벼운 의문도 스쳤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뭐, 별거 아니구만.’


식사를 하고, 왠지 나른해져서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팔을 스윽 쓰다듬었는데 감촉이 남달랐다. 내심 놀랐다. ‘묵은 것을 밀어내고 한 꺼풀 탈피한 나(Brand new)’라는 인식이 새삼 와닿았다. ‘별거 아니구만’이라니. 이 무슨 오만한 생각이란 말인가. 마치 별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하고 매끈하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때를 밀었지.


비로소 깨끗해진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마침 1월 둘째 주가 끝나기 전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1월 1일부터 설날까지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비로소 깨끗해진 마음으로, 새해마저 그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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