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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Feb 06. 2023

비로소 깨끗해진 마음으로 1

1인 세신숍 방문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이런 서두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 사람과 아닌 사람을 반으로 나누었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처음을 열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해보았다. 왠지 의미심장해 보인다).

때를 미는 사람과 때를 안 미는 사람.


나는 때를 미는 쪽이다. 일요일 새벽 5시 50분, 목욕탕이 문을 여는 시간과 초등학생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마지노선이 첨예하게 맞닿은 그 시간,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엄마의 손에 끌려가 살이 익을 듯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당신도 때를 미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물에 몸을 담가 때를 천천히 불리는 것을 선호했다. 나 또한 그 습관을 따랐다. 먼저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온탕에 몸을 오래 담그고 나와서 손닿는 곳의 때를 삭삭 민다. 그후 나-엄마-언니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오른쪽으로 돌아서 싹싹 왼쪽으로 돌아서 싹싹 서로의 등을 밀어준 뒤 탈의실로 나와 온몸에 보디로션을 찹찹 바른 후 살짝 노곤해진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퉁퉁 불은 손으로 역시나 불어서 말랑해진 손톱과 발톱을 깎고 나면, 평범한 온도의 바람도 왠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일요일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때를 민다. 어렸을 때와 달라진 점이 또 하나 있다면 세신 비용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때를 밀면 피부가 어쩌고 각질이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당기는 때가 있다. 단순하게 ‘따순 물에 몸을 지지고’ 싶어질 때나 어느 순간 종아리에 갈라져 있는 피부가 눈에 보이거나 보디로션을 도탑게 발라도 로션이 굳어진 채로 일어나는 것만 같은 촉감이 손끝에 느껴질 때 한 꺼풀 벗겨내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이다. 그건 무엇을 해도 잘 되지 않았을 때, 작심삼일 혹은 세 걸음 나아간 후 왠지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 백스텝 하고 싶을 때 다시 새로 시작하고 싶은 기분과도 일치한다. 그리해도 잘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산재하지만 때를 미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까 목욕탕에 간다.


코로나19가 횡행하고부터는 목욕탕에 통 가질 못했다. 목욕탕에 가고 싶어질 때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코로나’와 ‘목욕탕’ 두 단어를 조합해 여러 가지 검색을 한 후, 당연히 그 두 단어의 조합으로 나오는 검색 결과일 목욕탕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한 소식을 일부러 찾아 읽으며 “아 역시 안 되겠지?” 속으로 몇 번이고 가늠했다(코로나시기에 목욕탕을 가도 안전해요라는 기사가 나올 리 없으니 내가 본 기사들이란, 뻔했으니까). 운명에 맡기고 일단 가서 시원하게 밀어버리자, 싶다가도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일까? 생각하며 마음을 접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거나 집에서 간단히 때를 밀면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집들이를 갔을 때 욕조가 있는 집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리두기 단계가 차츰 느슨해지고 이제는 괜찮겠다 싶을 무렵, 목욕탕을 찾아갔더니 단골 목욕탕은 이미 폐업한 후였다. 거리도 적당하고 목욕탕의 크기도 적당하고 세신사의 솜씨도 훌륭하고 가격도 합리적이고 다년간의 왕래로 인해 출입구를 드나드는 것에 적응을 마친 목욕탕이 문을 닫았다니 퍽 섭섭했다. 동네에서 이만한 목욕탕을 다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채로 찾다보니 온갖 목욕탕 리뷰들도 낮은 별점을 준 게시글의 내용에만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이미 마음이 닫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목욕탕은 공간이 가진 특수성 때문에 처음 갔을 때 꽤 긴장할 수밖에 없다. 수납을 하는 일, 남탕 혹은 여탕을 제대로 찾아 들어가는 일, 들어간 후 여러 옷장들 가운데 출입구와는 적당히 떨어져 있지만 목욕탕 출입구와는 가까운 옷장을 찾아 내 옷을 넣는 일,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 일, 여러 탕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조금 뜨겁다 싶은 온도의 탕을 찾아내는 일, 사우나실의 상태를 체크하는 일, 세신사와 다음은 내 차례예요! 하는 수신호를 주고받는 일, 모든 것이 새로운 목욕탕에 가면 모두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단계들이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하나하나 직접 가보며, 여기는 이런 점이 좋군 혹은 별로군 판단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 시기를 지나며 갑작스레 마스크를 벗은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라는 것만큼이나 내겐 목욕탕의 풍경이 아주 낯설게 다가왔다. 그렇게 목욕탕엔 가지 않고 매일 집에서 샤워를 하거나 때로는 큰맘 먹고 호캉스를 가서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몸을 담그는 정도로 만족했다.

목욕탕의 별점 낮은 리뷰들만 읽다보니 머릿속에서는 목욕탕에 대한 공포감이 매우 커져서 왜인지 믿을 만한 사람이 반짝 나타나 “내가 가봤는데 이 목욕탕 최고야” 하지 않는 이상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해를 맞았다. 연말쯤,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 엄마와 오랜만에 목욕탕에 가기로 약속했다가 예정보다 빠르게 올라오는 바람에 가질 못했다. “목욕탕 못 가서 어쩌냐.” 걱정하는 엄마에게 “목욕이 뭐라고. 올라가서 하면 돼” 하고 쿨하게 대답했지만 막상 올라와서는 다시 목욕탕 리뷰를 찾아보는 일을 반복했다. 막상 쓰고 보니 되게 소심한 사람 같은데(맞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오래 가지 못한 만큼 최상의 목욕탕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 같기도.


목욕탕을 찾아 헤매는, 그러나 내내 헤매기만 하는 히치하이커의 어느 새벽. 자려고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때그때 생각나는 키워드를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보다가, 수순처럼 목욕탕 생각이 났다. 늘 하던 것처럼 목욕탕과 다른 단어들을 조합해서 검색을 하던 차,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서울에 있는 좋은 목욕탕을 모아서 소개해주는 큐레이션 기사였다. 서울이라는 포괄적인 지명답게 가는 데만 한 시간은 넘게 걸릴 법한 곳의 목욕탕부터 값비싼 호텔의 목욕탕 등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세신숍 OO.

세신숍이라니.


낯설지만 특색을 짐작할 법한 단어에 눈이 뜨였다. 기사의 내용 역시 이 시기에 목욕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혼자만 이용하니 감염 위험도 적고,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때를 밀고 나올 수 있다고. 당시 기사가 소개한 공간은 집에서 먼 곳에 있어서, 지도 앱에 세신숍이라는 단어 조합으로 몇 번 검색을 했더니 제법 가까운 거리에 세신숍이 하나 보였다. 앞선 기사에서의 긍정적인 이야기로 인해 인상이 퍽 후해진 터라, 리뷰도 왠지 좋은 내용만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각종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한 후, 여러 후기들을 살펴보고 나니 결심이 섰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당장 가야겠다! 하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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