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했다
올해는 전반적으로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오래 근무한 회사를 나왔고 재계약한 집을 새롭게 정리했다. 그러면서 가구의 위치를 옮기고 버리고 새로 샀다. 마지막까지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미루고 미루던 ‘그곳’도 정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책장이다.
집이 좁은 탓도 있지만 나는 물건 욕심이 딱히 없는 편이다. 때문에 집에 다녀간 사람들마다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정말 뭐가 없다”는 거였다. 정작 나는 “뭐가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였다. 상경한 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짐은 이사를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심지어 서랍장과 책꽂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것을 그대로 옮겨 와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는 중이다.
처음엔 이왕 정리하는 김에 이것저것 다 버리고 들일 것은 새로 들이자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오늘의집 어플 속 3D 인테리어를 활용해 가구의 배치를 요리조리 바꾸고 갖가지 시뮬레이션을 짰으며 커튼도 새로 달고 블라인드도 설치하고... 이렇게 저렇게 남들처럼 완벽해 보이는 집을 구상해 보았다(인테리어 콘셉트는 ‘90년대 홍콩식 인테리어’였다). 바꿀 것은 많았고 남길 것은 없었다. 그렇게 가상공간 속의 완벽한 집이 꾸려졌다. 그러니 모두 사들이고 설치하고 배치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앞서 말한 ‘그곳’. 책장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짐처럼, 오랜 세월 동안 소유해 온 책들을 정리하는 일 또한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당장은 읽지 않더라도 언젠간 읽을 거라며 가지고 있던 책들,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을 보며 “아니, 책이 이렇게 많았어요?” 하며 놀라던 이삿짐센터 직원과 함께 책을 날랐던 몇 번의 이사에서 살아남은 책들.
젖거나 찢어져 보내주어야 했던 책들을 제외하고는 계속 나와 함께 옮겨 다녔으니 집의 크기에 비해 과잉이긴 했다. 물론 출판업에 종사한 사람이라면 응당 겪어온 일일 테다.
그러므로 한 번 정리해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시간도 많겠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앉은자리를 기준으로 한쪽에는 남길 것, 한쪽에는 정리할 것을 놓기로 했다. 먼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과 산문집 리스트는 일단 빼두었다. 선물 받은 책 특히 앞장에 메시지가 적힌 책들도 빼두고, 참, 내가 편집한 책들은 중요하니까 또 한쪽으로. 시인선과 세계문학전집과 작법서와 좋아하는 작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가와 또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도 한쪽으로. 두 권 이상 있는 책들은 한 권만 남기고 나중에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선물해 주어야지. 그리고 또...
그런 식으로 분류를 하다 보니 보낼 수 있는 책들이 많지 않았다. 마지막 한 권까지 모두 분류를 하다 보니 그저 책장에서 책을 모두 꺼냈다가 다시 꽂아 넣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약간 허탈했다.
이게 아닌데... 곤도 마리에 선생님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했고, ‘신박한 정리’에서는 정리가 ‘많은 것을 덜어내고 나에게 진짜 필요한 우선순위를 찾게 해 준다’고 했는데 모조리 껴안은 상태로 설레고, 모든 것이 중요해 덜어내지 못한 나는 이제 무엇이 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 난관에 부딪혔다. 며칠간 고심해 완성한 나의 3D 슈퍼 퍼펙트 인테리어는 비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모아두면 많은데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이 있어 내게 남겨져 있는 책들이다. 나는 “나에게 정말 책장 정리가 필요한 것일까?” 근원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앞으로 새로운 책들을 사들일 것인데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이 공간은 더없이 비좁아질 것인데. 사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비움보다는 더 큰 집일지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큰 집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책 더미로 눈을 돌렸다. 다시 냉정하게, 내게 있어야 할 책들을 세심하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랬는데도 생각보다 책장이 많이 정리된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이나 분류했는데도 여전히 있어야 할 것들이라면 내게 두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책방의 어느 부분에는 책더미가 불규칙하게 쌓여 있고 또 어느 부분은 이상하리만치 정갈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처음 구상한 슈퍼 퍼펙트 인테리어 역시 생각한 것의 절반 정도만 완성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공간을 쓸모에 맞게 배치하는 식으로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더 깔끔해졌고 초등학교 때 쓰던 서랍장과 책꽂이도 생각보다 너무 튼튼해서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한 차례 칠을 벗기고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던 터라 더 애정이 갔다.
멀쩡한 걸 버려가면서까지 완성해야 할 슈퍼 퍼펙트 인테리어는 없다. 나는 있는 것들을 제 쓸모에 맞게 비치한 뒤, 정말 없는 채 살았던 거실용 큰 테이블과 의자만 샀다. 남들이 우리집에 온다면 여전히 “정말 뭐가 없다” 할 것이고, 스스로는 “뭐가 너무 많아” 하는 상태로 당분간은 더 살아갈 것 같다. 비울 것은 비웠는데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는 것들을 가지고, 최소한의 것만 채운 채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인테리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