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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Dec 28. 2020

트렌트 레즈너의 ‘르상티망 3부작’

나인 인치 네일스의 1, 2, 3집 리뷰

트렌트 레즈너가 이끄는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는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전자 음악의 소음으로 개인의 정동을 묘사하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주류 음악시장에 올려 놓았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했던 1집부터 3집까지의 앨범들은 개인의 르상티망을 묘사하고 전시하는 데에 천착하는 일련의 경향성을 갖는다. 오늘은 이 세 장의 앨범들을 다시 들어본다.



  트렌트 레즈너와 르상티망, 그리고 세 장의 앨범들


  르상티망(ressentiment)는 좌절감과 원한 감정을 가리키는 니체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르상티망은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성취와 욕망이 부정되고 무너지는 순간으로부터 촉발된다. 르상티망은 욕망과 성취가 부정되는 지점에서 그것의 원인에 대한 적대감, 열등감, 질투심으로 이어진다. 이것의 기제는 지극히 미시적인 것일 수도, 혹은 거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오늘날 ‘인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요컨대 이성애 중심적 연애시장에서 탈락해 타인과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온라인 상에 이성을 상대로 쏟아 붓는 혐오 표현도 ‘연애’라는 사회적 욕망이 좌절된 지점에서 만들어진 르상티망에서 기인한다. 연애라는 것이 지극히 사적인 욕망으로 보이지만, 이성애적, 유성애적 가치와 연애•결혼이 사회적 성공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는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트렌트 레즈너는 이러한 르상티망적 자아에 자기를 적극적으로 투영하고 이입하는 작업을 했다. 트렌트 레즈너의 르상티망을 구축한 것은 무엇일까. 트렌트 레즈너의 모부는 10대일 때 레즈너를 낳았고, 레즈너가 5살일 때 이혼을 했다. 레즈너는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벽촌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다. 레즈너는 외부 세계와 도회지의 문화로부터 격리된 시골 생활에서 고립감을 느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악기를 배우고, TV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레즈너의 르상티망은 격리된 환경 속 새롭고 다채로운 문화적 경험의 부재로부터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날 것의 욕망과 정동: ‘Pretty Hate Machine’


<Pretty Hate Machine>

아티스트: Nine Inch Nails

발매일: 1989년 10월 20일

장르: 신스 팝, 인더스트리얼 록, 인더스트리얼 댄스, 일렉트로닉 록

레이블: TVT

로자의 평점: (9/10 - "훌륭한 명반이에요!")


  집 근처의 대학교에 진학한 레즈너는 음악을 하기 위해 학교를 1년만에 중퇴하고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가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키보디스트로 활동했고, 돈을 벌기 위해 라이트 트랙 스튜디오에서 청소 같은 잡다한 일을 하기도 했다.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던 트렌트 레즈너는 스튜디오의 사장 바트 코스터에게 스튜디오가 비는 시간 동안 자신의 데모 작업을 무료로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본인의 구상에 맞는 세션을 찾을 수 없었던 레즈너는 드럼을 제외한 모든 악기를 자신이 연주하며 데모 작업을 했다. TVT 레코드가 트렌트 레즈너의 작업물에 관심을 보여 그와 계약을 했고, 1988년에 완성된 데모 ‘Purest Feeling’은 수정을 거쳐 나인 인치 네일스의 1집 ‘Pretty Hate Machine’으로 재탄생한다. 이 시절 트렌트 레즈너는 홀로 스튜디오에 처박힌 채 히키코모리처럼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며 작업에 천착했다.


  나인 인치 네일스가 1집을 작업하던 80년대 말은 신스 팝 문화가 초신성과 같이 폭발하고 있을 때였다. 전자 음악을 하던 트렌트 레즈너는 전자 악기 신디사이저를 전면에 내세우며 서정을 구축해가며 주류 음악시장을 장악한 신스 팝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은 뉴 웨이브와 신스 팝의 하위 장르인 다크웨이브의 정점에 있던 영국 밴드 디페쉬 모드였다. 디페쉬 모드는 우울한 흑백의 코스튬과 화장을 내세우며 서정적 고독 속으로 침잠했던 고딕 록의 분위기를 토대로 신스 팝 음악을 만들었다. ‘Pretty Hate Machine’은 이를 충동적이고 과격하게 변주한, 공격적인 다크 웨이브 문법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출현할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경향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인 인치 네일스에 영향을 준 디페쉬 모드의 "Strangelove"(1987)의 뮤직 비디오.


  ‘Pretty Hate Machine’은 위에서 언급한 충동적이고 과격한 고독의 토대 위에서, 인셀적 르상티망을 묘사하는데 치중한 음악을 담고 있었다. 가령 수록곡 “Sin”이나 “Terrible Lie”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나 결국 자기를 배반한’ 옛 연인에 대한 저주를 직설적으로, 혹은 어떤 알레고리를 거치며 퍼부어대고 있다.


'Pretty Hate Machine'의 리드 싱글 "Head Like a Hole"의 뮤직 비디오.


  신경증적 인간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The Downward Spiral’


<The Downward Spiral>

아티스트: Nine Inch Nails

발매일: 1994년 3월 8일

장르: 인더스트리얼 록, 인더스트리얼 메탈, 일렉트로닉 록

레이블: Nothing, Interscope

로자의 평점: (9/10 - "훌륭한 명반이에요!")


  나인 인치 네일스의 1집은 언더그라운드에서 괄목할 만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 TVT 레코드의 사장은 저작권과 공연 수익 문제로 트렌트 레즈너를 오랫동안 괴롭혔고, 레즈너의 음악 활동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더욱 더 ‘잘 팔릴’ 결과물을 요구했으며, 그의 공연 스케줄을 제멋대로 조정했다. 가령 TVT 레코드는 음악적 스타일이 전혀 다른 하드 록 밴드 건스 앤 로지스의 오프닝 공연에 나인 인치 네일스를 세우며, 레즈너가 건스 앤 로지스 팬들의 야유를 듣도록 만들기도 했다. 미칠 지경이었던 트렌트 레즈너는 소속사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법정의 문을 두드렸고, 길고 지난한 소송이 시작된다. 소송은 레즈너가 ‘Broken’(1992)과 ‘Fixed’(1992)라는 두 장의 EP를 작업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인터스코프 사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를 데려가며 레즈너가 자유롭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를 사장으로 하는 ‘낫띵 레코드’라는 회사를 차려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받으며 새로이 구축된 레즈너의 르상티망은, 어떠한 신경증으로까지 확대된 듯 하다.


  트렌트 레즈너의 이적 이후 처음으로 나온 나인 인치 네일스의 2집 ‘The Downward Spiral’(1994)는 한 개인이 겪는 심리적 몰락의 여정을 따라가는 컨셉트 앨범이다. 여기에는 레즈너 본인이 겪었던 르상티망적, 신경증적 경험들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음이 틀림 없다. 여기에서 레즈너는 전작의 ‘공격적으로 변주된 디페쉬 모드 풍 음악’에 더불어 EP 앨범에서 실험했던 파괴적인 노이즈, 메탈 음악의 질주감 가득한 구조와 과격하고 폭력적인 하이 게인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이는 곧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형식적 완성을 가리키기도 했다.


메탈 문법이 적극적으로 차용된 앨범 수록곡 "March of the Pigs"의 공식 라이브 영상.


  ‘The Downward Spiral’은 인간을 심리적으로 잠식해가는 여러 르상티망의 기제들, 그리고 여기에 천착하며 무너져 가는 개인의 신경증과 자기파괴적 행동들을 묘사하는 데 천착한다. 인셀적 르상티망이라는 한 가지 기제에 머무르던 1집에서, 인간의 우울을 구성하는 기제들의 총체, 인간이 우울과 신경증에 잠식당하는 과정의 총체를 다루는 것으로 주제의 확장을 이룬 셈이기도 하다. 자기파괴적 인간상을 소개하는 트랙 “My Self Destruct”로 시작하는 앨범은, 영적인 것으로부터의 소외를 토해내며 종교적 가치에 대한 니체적 분노와 부정을 쏟아내는 “Heresy”, 자본주의 사회로부터의 소회를 토해내며 유산계급에 대한 욕설을 흩뿌리는 “March of the Pigs”, 섹슈얼리티 실천으로부터 소외된 개인의 병리적 감정을 묘사하는 “Closer”로 이어진다.


앨범의 싱글 "Closer"의 뮤직 비디오.


  이런 환경 위에서 개인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르상티망은 적대감으로 드러나지만, 모두로부터 소외되어서 누군가가 르상티망의 근원을 해석해줄 수 없는, 자기의 언어를 획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뒤틀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괴물이 되어 혐오를 모든 대상을 향해 난반사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가령 “Big Man with a Gun”에서는 커다란 총을 팔루스적으로 자랑하며 사방에 갈겨대는 화자가 등장한다. 이러한 폭력의 대상은 결국엔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한 자기 자신으로 향한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Hurt”에서는, ‘내가 여전히 감각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해를 하는 개인이 등장한다. 그는 이제 자기가 무엇이 되었는지도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건강한 자아로의 회복을 갈망한다.


쟈니 캐쉬가 커버하기도 한 앨범의 마지막 수록곡, "Hurt"의 1995년도 라이브 영상.



연약한 개인, 침잠하는 개인: “The Fragile”


<The Fragile>

아티스트: Nine Inch Nails

발매일: 1999년 9월 21일

장르: 인더스트리얼 록, 일렉트로닉 록, 앰비언트, 프로그레시브 록

레이블: Nothing, Interscope

로자의 평점: (8/10 - "흥미로운 앨범이에요!")


  몰락하는 개인의 서사를 높은 완성도와 파괴적인 사운드를 그려낸 ‘The Downward Spiral’은 미국 앨범 차트에서 2위에 올랐고, 94년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수십만의 관중을 앞에 두고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악기를 부숴가며 펼친 정동적이고 파괴적인 공연은 대중과 평단의 이목을 끌며 나인 인치 네일스에게 그래미를 안겼다. 이 시기 나인 인치 네일스의 성공은 그로 하여금 세기말 미국 록 음악의 구세주라는 수식어를 얻게 했다. 그러나 트렌트 레즈너의 르상티망과 세기말적 불안 그리고 성공이 주는 부담감이 선사하는 신경증은 그의 창작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목을 죄여 가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어 갔다. ‘The Downward Spiral’의 녹음 과정에서 다른 세션들과 함께 작업했던 트렌트 레즈너는 다시금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의 다음 앨범인 3집 ‘The Fragile’은, 5년 뒤인 1999년 CD 두 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앨범의 두 번째 싱글 "We're in This Together"의 뮤직 비디오.


  ‘The Downward Spiral’이 르상티망이 야기한 분노와 적대감을 자아 바깥으로 표출하는 외향적인 앨범이었다면, ‘The Fragile’은 끔찍한 우울과 고독이 야기하는 홀로됨을 통해 자아 내부를 향해 파고 들어가는 내향적인 결과물이었다. 전자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메탈과 노이즈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이 앨범은 개인의 우울증적 내면을 탐구해가는 과정을 방대한 서사로 구축해가기 위해 프로그레시브 록의 복잡다단한 구조를 받아들인다. 한 편으로 끔찍한 적막함을 묘사하기 위해, 앨범 곳곳에는 텅 빈 공간감을 지시하는 단조의 미니멀리즘적 피아노와 앰비언트 전자 악기 사운드가 배치되어 있다. ‘The Fragile’은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된 채 스스로의 고통을 곱씹는 내성적 자아의 독백으로 점철되어 있고, 트렌트 레즈너는 실제로 앨범 작업을 마친 뒤 투어를 돌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채 술과 헤로인, 코카인에 손을 댔다. 나인 인치 네일스와 유사하게 “Creep”에서 개인의 인셀적 르상티망을 묘사하는 음악을 시작했던 라디오헤드가 ‘OK Computer’와 ‘Kid A’에서 소외적 상황을 야기하는 사회구조 전체를 조망하는 음악미학의 ‘사회학적 방법론’을 향해 시선의 확장을 이루어냈다면, 이 시기의 트렌트 레즈너는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천착하는 음악미학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론’을 향해 한 우물을 파 내려갔다. 르상티망적 자아에 잠식당해 무너져가던 트렌트 레즈너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며 새로운 작업물을 내놓기까지는 이후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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