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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Sep 23. 2020

나의 쓸모를 찾아서

이 사람은 OO용입니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내 마음이 어수선한 것을 보니.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의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개를 쳐든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짜 잘하는 건 뭘까?”

“엄한 곳에서 괜히 힘만 빼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은 자존감을 끌어내리고 마음을 황량한 벌판으로 내몬다. 이게 맞겠거니... 생각하며 한 방향으로 향하던 마음의 발걸음이 주춤한다.


조각배를 타고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점멸하는 불빛을 향해 노를 저었다. 꺼졌나 싶으면 다시 켜지고, 켜졌나 싶으면 다시 꺼지는... 그래도 결국은 켜질 것이라 믿고 계속 노를 저었다. 그런데 그 불빛이 사라졌다. 갑자기 갈 곳을 잃은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이다.


세상엔 어쩜 그리도 잘난 사람들이 많은지! 기가 죽는다. 내가 끼어들 틈이나 있을까? 더럭 겁이 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면서 무기력해진다.


꼭 계절 탓만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아성찰을 가장한 의심의 시간! 어쩌면 내 마음의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의심이 시작될 때면 떠올리는 오래전 그때가 있다.


두 아이 모두 유치원에 보내 놓고 호젓이 카페에 앉아 책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던 시절.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찰랑하게 담긴 머그컵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데 컵에 새겨진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컵은 매장용입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쓱 보고 넘겼을 그 문장이 그날은 이상하게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하물며 컵도 용도가 있는데...
나란 사람의 용도는 뭘까?


육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나’를 잊고 살던 나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닌 오롯이 나란 존재의 용도와 쓸모에 대한 의문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도 컵처럼 각자의 용도와 쓸모가 잘 보이는 곳에 새겨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람은 OO용입니다.’


그랬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절반 이상으로 줄지 않았을까? 특히 나같이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이.


일본에는 메뉴의 선택을 셰프에게 맡기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이런 가게 시스템을 ‘맡긴다’는 뜻의 ‘오마카세’라고 부른다던데. 나는 셰프가 아닌 신에게 ‘오마카세’를 외치고 싶다.  두렵다는 핑계는 살짝 숨기고, 전문가의 선택을 신뢰한다는 이유와 명분을 내세워 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스스로 쓸모를 찾아 나설 수밖에.


쓸만한 가치를 뜻하는 “쓸모”는 보통 ‘있다’ ‘없다’와 함께 사물의 가치를 매기고 판단할 때 주로 쓰인다. 그래서 쇼핑할 때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문방구에서 우리 애들이 자주 쓴다.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가 스티커 여러 장을 손에 들고 세상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스티커 한 장, 한 장을 내게 보이며 묻는다.


“엄마. 이게 쓸모가 있을까? 아니면 이게 더 쓸모가 있을까?”


미안... 나에겐 다 무쓸모란다... 대충 하나 골라 빨리 집에 가면 좋으련만, 둘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더니, 그런 둘째에게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민이라는데,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래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다가  다시 쓸모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으로 돌아오곤 한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계속 같은 구간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나도 둘째처럼 하고 싶은 일마다 쓸모를 따져 비교하고 결정해야 하나?


둘째가 채근한다. 그새 여러 장 중 두 장으로 후보가 압축됐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이지선다 문제를 앞에 둔 양 급 진지모드로 표정을 바꾸고 얼른 둘째의 시선을 쫓는다. 양손에 스티커를 들고 말로는 둘 중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이미 아이의 시선은 한쪽으로 고정돼 있다. 답정너인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는 나에게 의견을 물은 게 아니라, 어떤 확신을 바랐던 것이다. 다 마음에 들지만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가는 그것, 머리보다 마음이 더 끌리는 그것을 선택하기 위한 확신!  


내가 둘째의 시선  끝에 있는 스티커를 골라주자 “그렇지?” 아이는 세상 홀가분하게 계산대로 향한다. 장난기가 발동하는 날에는 일부러 다른 것을 골라주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런저런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으며 선택을 종용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많은 일들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일은 결국 하나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일, 승부욕 제로인 내가 유일하게 욕심을 내는 일. 이미 내 마음은 그날 카페에서 컵에 새겨진 글귀에 뒤통수를 맞은 그 순간부터 정해졌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의심하는 이유는 딱 하나, 나도 둘째처럼 내 선택에 힘을 실어줄 확신을 얻고 싶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확신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모범적인 답만 돌아올 뿐이다. 사물의 쓸모는 사람이 정하지만, 사람의 쓸모는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처럼. 만약 나 아닌 누군가에 의해 나의 쓸모가 정해진다면 그것은 이용당하는 것일 테니. 알면서도 괜히 투정을 부린다. 결국 나는 관심이 고픈 건가? 그때 또 내 마음에 꽂힌 글귀가 있다. 이번엔 헬스장이었다.  


선택한 목표에 확신을 갖고 그것을 매일 반복하라.
매 순간에 당신의 열정을 다하는 것,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그래! 의심은 방황을 낳고, 그 방황은 악마의 첫 번째 술책이라지 않던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다.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했으니 이제 집중만 남았다. 자, 이제 나를 믿고 다시 슬슬 노를 저어볼까? 저 멀리서 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주기적으로 의심의 시간을 갖게 되리라. 의심하고 방황하고 다시 털고 나아가기를 반복하겠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불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주기를 돌고 또 돌다 보면 나의 쓸모를 찾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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