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없는 뒤끝작렬 이야기
요즘 개인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일회용 컵 사용도 줄이고 할인도 받을 수 있어서, 나 역시 웬만하면 개인 텀블러를 챙기는 편이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할인은 가능하지만 음료를 개인 텀블러에 담아주지 않는 곳이 있단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개인 텀블러를 챙겨갔다. 직원에게 주문을 하고 텀블러를 쭈뼛쭈뼛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개인 텀블러에 담아드리지 않습니다.”
젊은 남자 직원의 매우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 역시 안 되는구나. 할 수 없지... 나는 텀블러를 거둬들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카드를 건네다 말고 멈칫했다. 텀블러 이용 할인은 받을 수 있단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저 텀블러 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직원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다.
“텀블러 이용 할인해드릴까요?”
“네.”
“앞으로는 미리 말씀해 주세요.”
“아, 네...”
조금 황당스러웠다. 당연한 걸 굳이 왜 물을까? 고객이 텀블러를 가지고 왔더라도 고객이 원해야만 할인을 해준단 뜻인가? 그렇다면 할인을 원하지 않는 고객도 있나?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 아주 없다 단정 지을 순 없겠지. 할인해 준단 말에 자길 무시하는 거냐며, 자기도 돈 있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할인해 준다면 기꺼이 받을 준비가 언제든 돼 있다. 그런데 텀블러 이용 시 받는 할인은 고객의 선택이었던 건가?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건 아니다. 뭔가 깔끔하지 않은 뒷맛이랄까. 그 직원의 잘못은 없었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달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다른 매장에 가거나, 이 매장을 다시 방문했을 때 할인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직원은 매뉴얼에 충실했을 뿐. 딱히 흠잡을 데 없이 적당히 친절했다.
나는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텀블러에 옮기며 생각했다. 그 직원이 적당히 친절한 만큼 적당히 오지랖이 넓었더라면 어땠을까?
“죄송하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개인 텀블러에 담아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300원 할인은 가능하세요.”
이렇게 말해줬더라면 뒤끝 없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오지랖이 넓다’는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그런 사람을 오지라퍼라고 부른다. 긍정적이라기보단 부정적인 느낌이 크다. 하지만 나는 주제넘는 간섭이 문제지 남의 일에 관심을 갖는 건 나쁘다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한 오지랖은 이타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적당한 오지랖이란 선을 넘지 않는 오지랖을 말한다.
이타심 [利他心] 명사> 남을 위하거나 이롭게 하는 마음. (반의어:이기심)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이타심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타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공부도 잘하고 창의성이 높다고 했다. 남을 위한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이 발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에 매우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만일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오지라퍼가 없다면 남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기부가 가능할까? 대학생이 만든 코로나 앱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만의 꿀팁을 공유하는 유튜브 콘텐츠는 또 어떤가. 유튜브야말로 오지라퍼들의 놀이터다. 우리는 그 놀이터에서 정말 많은 정보를 얻고 세상과 연결된다. 아낌없이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블로그는 말할 것도 없다.
흔히 요즘 애들은 정이 없다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신 오지라퍼가 있다. 각자 섬처럼 살아가는 세상에서 오지라퍼는 이 섬과 저 섬을 연결해 주는 연락선 같다. 기분이 처질 때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면 금세 기분이 봉긋해진다. 내가 올린 피드에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러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다 공감의 댓글이라도 달리면 큰 힘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오지랖 크기는 얼마나 될까? 나는 과연 이타적인 사람인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남에게 바라고 아쉬워하기 보다 나부터 오지랖을 좀 넓혀야겠다. 나의 적당한 오지랖이 누군가에겐 관심이 되고 힘이 될 수도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