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로망을 위하여
살아오면서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았던 일보다 나빴던 일이 더 많았던 것도 같다. 결국 인생은 순탄함과 파란만장함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무한 반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복의 회차가 늘어날수록 그만큼의 경험치가 쌓이고 내공이 깊어지면서 낙차도 점점 줄어든다고 믿는다.
덕분에 나이 먹는 게 싫지만은 않다. 그땐 이거 아니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살아 보니 그거 아니면 죽고 그런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덕분에 예전만큼 전전긍긍하지 않게 됐다. 이게 안 돼? 그럼 요거. 요것도 안 돼? 그럼 저거. 저것도 안 돼? 그럼 그거 등등. 제법 여유가 생겼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기왕이면 즐기자!
그런데 둘째 딸이 내게 물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 사실은 즐기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 아니에요?”
맞다. 존버의 세상에서 일단 버티는 게 먼저다. 즐기는 건 다음 문제, 넥스트 레벨이다. 버티다 보면 즐기게 되는 날도 올까? 나는 어땠지? 힘들었던 시절을 돌아봤다. 그때의 나는 다행히도 버티고만 있지 않았다. 즐기는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암 치료를 위해 매일 같이 병원을 오가던 그때도 나는 나름 괜찮았다. 절벽 끝에 선 심정으로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같던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자기 방어기제로 시간과 함께 나빴던 기억이 휘발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를 버티게 해 준 나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바로 ‘로망’이었다.
때로는 도망치는 게 최선일 때도 있다. 매번 쏟아지는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버틸 필요는 없다. 나에게 로망은 그런 존재였다. 폭우를 피하게 해 준 도피처. 그 로망은 거창한 게 아니라 대체로 작고 별것 아닌 하찮은 로망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로망’이라고 말하는 것들 대부분은 사실 찰나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영화 속 한 장면이라든지, 추억 속 한 장면처럼. 찰나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75분의 1초다. 즉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의 기억이 우리의 삶을 보다 로맨틱한 방향으로 이끈다.
세상에 꿈꾸는 것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큰 로망이든 하찮은 로망이든 로망은 행동하지 않으면 헛된 꿈에 불과하다. 로망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면 그다음은 행동할 차례다. 그런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뇌는 변화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것부터 조금씩 행동해야 꾸준히 할 수 있다. 나는 로망을 최대한 작게 쪼개서 하찮게 만들었다. 하찮은 로망은 만만해서 딱 1g의 용기면 충분하다.
약물 중독의 문제를 다룬 영화 <벤 이즈 백>을 보던 중 중독자들의 자조모임 장면에서 다 같이 낭송하던 기도문이 내 귀에 쏙 꽂혔다. 찾아보니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문 중 일부였다.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용기를 주시며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 후 이 글귀는 나의 인생 기도문이 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 상태가 쾌락 ‘아타락시타’라고 말했다. 수용과 용기, 지혜만 있으면 그게 바로 아타락시아다. 나는 여기에 로망, 그것도 딱 2%만큼의 하찮은 로망을 덧붙이고 싶다.
이루기도 쉽지만 버리기도 쉬운 하찮은 로망들. 기왕 존버하는 거 하찮은 로망들로 일상을 채우고 비우면서 살다 보면 내가 그랬듯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내 삶의 방향과 결을 만들어준 하찮은 로망들. 75분의 1초의 기억과 1g의 용기로 만든 하찮은 로망 덕분에 힘든 시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필터를 씌운 듯 뽀샤샤 해졌다.
로망을 다른 말로는 낭만이라고 한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낭만을 ‘개멋’이라고 했다. 남이 뭐라든 내 멋으로 사는 것, 하찮은 로망이야 말로 개멋이지 않을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멋 정도는 부려도 괜찮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만의 하찮은 로망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