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담론>
주역에서의 관계론은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성찰이라고 하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성찰은 시선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즉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를 아는 것이라고.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이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한다.
그리하면 부딪힐 일이 없다.
미완성은 목표보다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긴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의 덕목이 변방에 처할 때 최고가 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덕목을 요약한다면 겸손이다.
겸손은 높이 있을 때는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할 때는 사람들이 함부로 넘지 못한다.
신용복의 <담론> 중 본문 인용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람들을 부를 때 그들의 이름대신 아파트 호수인 숫자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예전에 나는 누구의 딸이었고 또 누구의 누나였고 누구의 엄마였는데
이제는
아파트 호수가, 숫자가 이름이 되었다.
관계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다.
가령 한 중년 남자에게 '박청일' 이란 이름보다는 '누구 집의 맏아들'이라고 할 때
본인이 느끼는 사회적 위치는 확 달라지게 마련이다.
허긴 예전부터 우리 부모님은 그러셨다.
"우리 집 큰 딸"
그런 명칭이 우리 집안에서의 나의 책임의 양을 결정짓고 미리 준비를 하였던 것 같다.
신영복 교수의 <담론>을 읽으며 <주역>이 그저 점이나 사주를 보는 책이라고 오해하였는데
세상을 보는 인식의 틀로 삼기에 훌륭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공자도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었던 책이 <주역>이라고 하지 않는가.
또한
더 나아가 주역에서 밝히는 관계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들인 듯하다.
성찰
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타인을 배려하는 힘을 잃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겸손
요즘은 자기 자랑의 시대다. SNS만 보아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자신의 대인관계를, 자신이 가진 집을, 자신이 다니는 여행지를 수도 없이 드러내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정말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의 자기도취를 보는 듯하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한없이 박탈감을 안겨주는 것들도 많고.
전 세계 어디서든 서로의 안부를 빠르고 쉽게 주고받으며 사진을 실시간 보내며 좋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 등의 놀라울 만큼 좋은 것들은 오히려 가려지는 듯하다.
절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사실 자주 인간관계서 부딪히게 마련이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도 자제 하고 매사에 자제해야 한다.
인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끝없는 소비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듯하다. 욕망은 끝이 없고 자본은 한계가 있다.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눈을 끌어간다.
미완성
완성에 이르지 못해도 과정은 남는다.
변방
변방은 득위의 자리다. 득위란 자기 능력이 100일 때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된다. 이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이나 권위, 또는 거짓으로 채우게 됨으로 자기도 파괴하고 소임도 실패한다.
30%의 여유가 상당히 중요하다.
이 여유가 창조성, 예술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70인 자가 100의 자리에 가면 자신에게는 기회가 되지만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다. 즉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영복 교수의 <담론>은 빨리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씹어서 천천히 즐기는 맛이 있다.
두꺼운 책을 한 장 두 장 넘기며 읽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 휴대폰은 정말 편리한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든 사진과 그림을 이미지로 볼 수 있고 그 흡입력은 날로 막강하다.
브런치 앱만 해도 그렇다. 실시간 좋은 글들이 장르별로 올라온다. 요즘 제일 소중한 것이 눈. 시력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눈의 피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수많은 것들을 빨아들일 텐데.
그러나
올봄에 이 브런치만 해도 '벚꽃'이란 단어와 함께 벚꽃 영상이,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독자들을 홀렸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 부류에 동참하였다.
벚꽃이란 단어 하나를 던져주었을 때 우리는 언젠가 찾아갔던 벚꽃을. 각자의 벚꽃을 떠올릴 테지만 우리는 그 화려한 이미지들 앞에 무력하게 굴복한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의 감각 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한다. 감각이 외부를 무한정 인체에 전달할 경우 인식 자체가 무너진다고.
인식은 대상을 선별하고 재조직 하는 주체적 실천이다. 영상이나 이미지가 그 압도적 전달력 때문에 인식 주체를 소외시킨단다.
그러므로 이 압도적인 이미지의 영상의 매력을 계속 즐기면서도 인식 주체인 자기 자신의 소외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시간을 억지로 내서 두꺼운 책들을 아주 천천히 재 음미하는 시간들을 가져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해서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