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사춘기로 접어들 때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만큼 자유로운 때가 있을까.
아버지는 일을 나가고 안 계신데 마침 엄마의 친목회 까지 겹쳐 집이 비거나 집안의 행사로 인해 장시간 둘만 남게 되면 가벼운 살랑바람이 가슴속에 불어닥친다.
이때야말로 텔레비전을 실컷 볼 수 있었고
엄마가 몰래 담근 포도주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커피를 실컷 타 먹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었다.
요즘처럼 커피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멀리 외항선을 타고 나간 아버지의 친구가 한 병씩 선물해 주던 일본산 멕스웰 커피였던 듯하다.
그 짙은 흑빛의 커피 향기는 정말 영혼을 혹하게 할 만큼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것인데
이게 맘대로 마시지 못하는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라.
아버지가 안 계시면 표가 안 나게 조금 떠서는 물에 설탕을 섞어 마시는 것이 여간 맛나지 않았다.
그뿐인가
동생과 술을 거르고 남긴 포도 껍질을 맛 좋다고 먹고는 헤롱헤롱 하였다.
그리고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만화영화를 몸을 널찍하게 펴고는 편하게 즐기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 될 드라마까지 실컷 본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늘 무서운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자체가 기분이 가벼웠다.
그는 자식들에겐 매우 엄격한 사람이라
밤늦게 오는 날에는 텔레비전의 윗부분을 손을 대 보곤 하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많은 시간 놀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책상 위에서 책을 펴는 시늉이라도 해야 욕을 덜 먹는 것이다. 특히
"오늘 배운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거나
"공책들 좀 갖고 와라."
그러면 그 날은 혹여 회초리로 맞을까 봐 아이들은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뿐이랴
수학 문제를 내어주고 풀릴 때는 아버지의 회초리가 신경 쓰여서 문제가 더 안 풀리고 머리가 엉키기만 하였다.
뭐 그 덕분에 공부를 좀 했다고 한다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사실 초등학교 때 우리 오누이겐 공부란 정말 힘들기만 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보다 더 성가시게 우리들의 성적이나 가방을 공책을 점검하였으므로 늘 조심스러웠다.
그러니 성적표를 받는 날은 정말 집에 오기가 싫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좀 지혜롭게 (?) 위기를 넘기고는 하였지만은.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아버지. 그리고 잔소리를 끝없이 하는 엄마.
두 분 다. 사춘기가 시작된 우리에겐 좋을 이유가 없었다. 단 용돈만은 절실했기에 불평 많은 집에서 견디어 내는 수밖에.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아버지에게 못 푼 불만을 엄마에게 풀기도 하였으나. 그녀도 자식들을 지혜롭게 감싸기 보단 그저 희생만 할 줄 아는 전통적인 여인이었을 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서 와보니 집에 아무도 안 계셨다.
동생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이 너무 좋아서 까불고 놀았다.
아버지는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거나 까불면 엄하게 절제를 시키는 분이라 우리들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돌아왔다는 기쁨에 그동안에 억눌렀던 마음의 생각들을 나누며 한참을 놀았다.
물론 그중에 아버지가 들으면 싫어할 내용도 있었다.
나중에는 둘이서 방에서 엉덩이 춤까지 춘 듯하다.
얼마나 놀았을까. 갑자기.
우리가 놀던 방 다락문이 열리더니 무서운 아버지가 내려오는 것이다.
아... 이제 죽었구나.
아버지는 대체 언제 다락방에 올라갔던 것인가.
얼굴이 벌게지도록 행복하게 놀던 우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정지하고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이제 회초리로 맞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아버지는 별 말이 없이 넘어가 주는 듯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오늘 숙제한 거 가져와 봐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숙제 없는 학교. 시험 안치는 학교.
자상한 아버지를 꿈꾸었다.
세월이 흐르고.
숙제에 질린 나는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서운 선생님이 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의 첫인상이 무서웠다고 말한다.
게다가 친구 같은 엄마가 되려 했는데 잔소리꾼 엄마에 무서운 엄마로 변한 나를 보았다. 그래서 자상한 엄마가 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난 후 외출 준비를 하는 내게
딸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랬다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은 완전 자유의 시간이야. 너무 좋아."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