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도시의 도로는 빛으로 환하다.
이렇게 추웠던 겨울을 만난 적이 있을까? 발가락 끝과 손가락 끝마디가 예리한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프다.
잠깐 저녁 끼니를 때우려고 길을 나섰는데 어디선가 군고구마 냄새가 진동을 한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군고구마가 하얀 김을 내며 굽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다 팔리고 없다 한다.
아쉽다.
고구마 대신 김밥 두 줄을 사서 학원으로 올라왔다.
난로가 켜진 학원은 훈훈하다.
교사실에서 김밥을 먹는 중에 다음 수업을 할 아이들이 속속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체하지 않도록 천천히 씹어먹어야지 하는 마음과는 반대로 어느새 김밥 한 줄이 금방 빈다. 이러다가 예전처럼 체하기를 반복하면 안 되는데.......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돈을 못 버나 싶은 생각도 들고. 밥을 먹지 않고는 못 버티는 나이가 되어서 밥때야 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다음 시간 아이들은 이제 예비 고등학생들의 수업이다.
늘 그렇지만.
내가 대하는 아이들은 늘 고등학생이고. 생김새나 성격들도 다른 듯 하지만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여겨질 때가 많은데 이번 이 아이들 반이 유독 처음부터 친숙하게 여겨졌다.
예전에는 자료를 줄 때 컴퓨터에 글을 쳐서 복사를 해서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무척 좋아 보이고 또 선생님의 입장에서 전문적인 냄새가 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그런 자판기 글자에 너도나도 익숙하니. 나는 예전의 손글씨가 더욱 가치 있고 정성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업자료를 하얀 종이에 손글씨를 직접 써서 복사를 한 후 나누어 주었더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거기에 그림도 살짝 그려 넣었다. 아이들은 직접 쓴거냐며 놀라워 한다.
아이들과 화기애애 해진 분위기에서 잠시 쉬는 시간에 이야기 한 토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남학생이
"샘, 이럴 때는 불을 꺼야 맛이죠~" 하면서 교실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끄지 마. 3분이면 끝나"
그러나 옆의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아이~ 불을 꺼야 해요~"
라면서 나머지 불도 다 꺼버렸다.
"아~ 참 문도 닫아요"
강의실 문 옆에 앉았던 남학생이 문까지 닫아버렸다.
무서운 이야기 한토막이었다. 잠시의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이야기의 끝을 알리는 찰라 누군가의
"왁~!" 하는소리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다들 자지러지게 놀랐다.
강의실에 한바탕 소란한 웃음이 터졌다. 수업을 재미있게 한 아이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간다.
창 밖을 본다.
아직도 거리는 불이 환하다.
아까 저녁을 먹기 위해 거리를 걸을 때. 나는 문득 내가 와 있는 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인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아무것도 내게 익숙한 것이 없었다.
거리를 걸을 때나 가게에 들를 때 늘 아는 사람을 만났던 예전의 그 거리가 아니었다.
다만 학원 건물 옆 1층에서 아로마 오일을 파는 여자를 안다.
낮에 샴푸를 사기 위해 들렀는데 주인은 내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겨울이 되니 몸이 너무 건조해져 걱정이라고 하니까 그녀는 바디로션을 꺼내와서 내게 발라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손등에 발라보면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여주인은 내가 고른 샴푸를 넣을 종이가방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녀는 샴푸가 아닌 테스트용인 바디 로션을 종이 가방에 담아 내밀었다.
"아니 이걸 왜?"
순간 그녀는 당황을 하면서 급히 바디로션을 꺼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주인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렸다.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 나이네요 뭐~ 저도 가끔 그런 실수를 해요~"
"네~ 하하. 그런가 봐요~"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우리 나이가 주는 공감대가 있었다.
잠시 후 가게를 나올 때.
"차 마시러 놀러 오세요." 라는 주인의 경쾌한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낯선 거리가 한뼘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나의 수업을 재밌게 듣고 선생님을 칭찬해주는 중학생도 생각난다. 이 곳에서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남학생이다. 그 아이는 어제 수업시간에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었다.
글감-20년 후의 어느 날
제목-동창회
2027년 11월 5일 화요일 날씨 맑음
제목-동창회 날
난 오늘 1학년 2반 동창회를 갔다. 그런데 애들은 나보다 못생겼었다. 특히 장시우가 제일 못생겼었다. 나는 잘생긴 얼굴에 제일 유행하는 옷과 신발을 신고 나타나니까 애들이 전부 부러워했다. 문환 도는 잘생겨져서 온 것 같다...(물론 내가 더 잘생겼지만) 이혜진은 똑같았다. 분명 몇 달 전에 성형외과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사실 그 성형외과는 내 친구가 원장이라서 물어보니까 의학기술로는 안 되는 얼굴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잘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강민성을 봤다. 어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조아람도 왔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현성도 왔다. 키가 180cm이 되어서 왔다. 나보다는 작았지만 많이 큰 거 같다. 주재영도 왔다. 아직까지 까부는 걸 보니깐 주재영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제일 충격 먹었던 것은 표민식이었다. 표민식을 보니 머리카락 색이 다 하얀색이었다. 제일 처음에 누군지 헷갈려서 "누구세요?"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정은비는 되게 이뻐... 지기는 무슨... 김민서는 조금 예뻐졌다. 오늘 저녁은 돈 많은 내가 샀다. 그다음 노래방을 갔다. 나와 민식이가 한동근 [미치고 싶다]를 불렀는데 애들이 잘 부른다고 칭찬해 줬다. 그다음 이혜진이 [강남 스타일]을 부르면서 말춤을 췄다. 이혜진이 분위기를 띄워주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2017년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의 글에는 시대의 문화가 담겨 있었다.
성형수술. 노래방. 그리고 2017년 대중가요 <미치고 싶다> <강남스타일>
나는 이 아이가 스스로를 가장 출세한 사람으로 설정한 것도 재미있었고. 키가 180센티인 친구의 키가 자기보다 작다고 한 표현이 재미났다. 이 학생은 지금 키가 작아서 좀 고민인 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생이든 거리의 사람이든
자주 만나 이야기 하며 마주치는 시간들이 쌓여 이방인의 거리에서 주인 될 날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