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도 아프다

by 미셸 오
대학 학력 고사 점수 발표가 있던 날


친했던 세 명의 여학생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를 찾아가 앞으로 가야 할 대학의 문이 좁아졌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울었다. 그때 보았던 바다는 어두운 비둘기 빛이었다. 암울한 미래처럼.

3년 지옥훈련의 대가 치고는, 그렇다. 그들은 그동안 참고 인내했던 시간들에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누구든 절망의 때에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는 법이다.

며칠 간 죽을 것처럼 고민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밥도 잘 챙겨먹고 늦잠을 자고 그동안 찌들었던 마음에서 벗어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대학 입학 점수보다 더 가치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 칸 낮은 길로 가더라도 살다 보면 더 높은 길로 가로질러 갈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가는 것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다시 재수라고 하는 감옥으로 가서 인생에 아무런 답도 없는 성의 없이 만들어진 책을 붙들고 씨름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곳은 햇빛도 새어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갑갑한 아이들의 강제수용소였다.

그래서 그들 삼총사는 같은 대학은 아니었으나 다들 대학에 들어갔고 찬란하지 못한 신입생들이 되었다.

자유로운 봄날의 캠퍼스. 멋진 남학생들. 그리고 날씬한 여대생들. 멋진 교수님들.

굴속에서 나온 토끼는 눈이 멀었다고 했던가. 굴 바깥 세상에 적응을 못해서.

그러나 그들은 꿈꾸었던 세상이 아니라서 적응을 못하였다.

잠을 못 자서 허옇게 뜬 얼굴로도 지금 이 순간을 참고 견디면 '사랑이 꽃 피는 나무'에서 나오는 키 큰 남학생들과 캠퍼스를 오고 갈 것이라는. 그러면 잔디밭에 엎드려 발바닥을 하늘로 두고 책을 읽으리라던 꿈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신입생의 봄은

다리를 펴고 누울 잔디는커녕 삭막한 운동장의 흙바람이 성가시게 눈 속을 파고들었다.

꽃샘바람이 머리와 옷을 후줄근하게 만들어 버리던 날 라면 곱빼기를 먹고 찻집에 가서 친구들과 전혀 멋지지 않은 남학생들의 뒷담화를 하였다.

캠퍼스 안에서 나란히 보조를 맞춰줄 멋진 남학생들은 다 공대 실험실에 있는 것이라고 위안을 하면서. 아주 가끔은 공대에 갔던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인문대 남학생들은 다들 프롤레타리아 전사들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어슬렁 거리며 강의실에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가끔 등나무 아래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툭 던지며 자신들의 지적 고상함을 드러내려 애썼다.

지방의 산 골짜기에서 올라온 촌스런 뚱보는 여학생들과 이야기할 때 자주 뒷짐을 지는 바람에 마치 동네 아저씨를 대하는 기분이 들게 했고. 자기네 학교에서 전교 몇 등을 했다던 검은 잠바의 여드름 남학생은 너무 건들거려서 진지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목에 힘을 너무 주어서 손만 대도 부러질 것 같던 남학생은 다혈질이어서 괜히 눈치를 보게 되고 그래서 다들 그를 멀리하였다. 그나마 성격도 외모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남학생은 탁구장서 요상한 여자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인기가 추락해버렸다. 그 이후 그가 정말 멋지게 하고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의 이상하게 치솟던 과거 목소리가 여학생들의 뇌리를 먼저 제압했다. 아무래도 남자는 목소리의 매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대학 저 대학 전전하다가 이제야 좋아하는 과를 찾았노라고 강의시간 때마다 어려운 단어만을 골라 써서 짜증 나게 하던 복학생은 눈이 퉁방울만 하게 커서 다소 위압감을 주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그들의 지식을 받아들일 만한 학생으로 그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누런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갈치처럼 길쭉하던 남학생은 구부정한 어깨로 세상에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리고 셋이서 몰려다니며 과 여학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 주던 짱가들. 게다가 여학생들은 알 수 없는 현역과 복학생들의 갈등까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잘난 복학생이 학교에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에 남방 그리고 어깨에 테니스 가방을 걸친 체 나타났다.

그런데 같은 과의 얌전하고 보수적인 언니들 셋이서 그 복학생의 종아리에 난 거뭇거뭇한 털을 보며 옷차림에 예의가 없다면서 한 마디 했고 평소 그에게 불만을 가졌던 현역들이 그것을 빌미로 그에게 엉겨 들었던 것이다.

가령 그런 남학생들이 있었다. 내가 말이야, 하버드쯤 갈 성적인데 재수없게 학력고사 점수가 안 나와가지고 말야. 그런 식의 자기 위안을 일삼는 무리들. 그런 무리들에게 난척하는 복학생이야말로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몸을 담은 과가 어떤 학과인가? 당시 인문학과에서는 최고. 예의를 중시하는 학과이지 않은가.

결국 퉁방울 눈이 사과를 하지 않은 관계로 현역 동기생 셋과 그가 몸으로 붙었다. 결과는 당연히 현역들의 승리. 원래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체력이 좀 약하긴 하다. 그래서 테니스로 몸을 단련하였는지도.

암튼 과 친구들은 평소 그에게 눌렸던 지식의 열등감을 그렇게 해소하였고 그도 그 후부터는 그렇게 잘난 척 하지 못했다.

기대했던 대학의 낭만은 대학가의 커피숍에서 대부분 해결되었다.

거기에는 음악과 커피와 부드러운 조명이 있었다. 그 살짝 어두운 조명은 미팅을 할 때는 얼굴을 가려주며 알 수 없는 기대와 설렘을 배가 시켰다. 그리고 친구들과 잡담할 때는 각자 가면을 쓴 것처럼 마음속 말들을 편하게 뱉어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액체 프림을 다갈색 커피에 부으며 흰 프림이 커피에 뒤섞여 흰색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다 보는 것, 그 자체로도 환상이었다.

그 외엔 강의를 들으러 이 건물, 저 건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늦은 밥을 먹고 또 그러면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도 교수들은 멋졌다. 반백이거나 하얗게 센 머리를 달고 지적으로 무장된 교수들의 얼굴에서는 이전에는 전혀 맡을 수 없었던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들이 가끔 띄우는 미소는 그 어떤 말보다도 그들의 인품을 화사하게 드러내곤 하였다.

물론 칠판에 필기를 제대로 해주는 교수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깊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쉽게 먹여주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너네들 알아서 도서관에서 내 논문을 찾아 읽어라.' 그런 의미라고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도서관 열람실을 찾아 칠판에 대충 낙서처럼 끄적거려 놓은 내용들을 찾아가며 읽었을 텐데.

한 교수가 있었다.

윤리 교양과목 교수였는데 서울에서 내려오던 시간제 교수였다.

첫 강의가 있던 날, 찬란한 자신의 학벌을 불러 주기 전부터 그는 외모로 먼저 강의실을 압도했다.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남색 바바리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들어설 때 그때 웬 차가운 바람이 우리들 앞으로 지나치는 듯하였다. 그리고 또박또박 끊어진 말투.

대패날로 깎아도 그렇게 예리하게 깎을 수 없을 만큼 가늘고 날카롭게 들어선 눈. 코. 입.

당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성적 외모를 들라면 주저 없이 그 얼굴을 들고 싶을 정도의 젊고 잘난 교수였다.

그러나 그의 장기는 무작위로 일으켜 세워 질문하기. 어려운 용어 쓰기. 숙제 많이 내주기.

여학생들의 가슴속 설렘들을 그렇게 그는 빼앗아 갔다. 그는 너무나도 높은 지식의 산에 올라 학생들을 내려다 보았기에 그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팠다.

그 외 캠퍼스를 가로지르던 교수들의 소박하고 향기로운 지성은 옆을 스치는 것 만으로도 설렜다.

어쨌든 훌륭한 교수들 덕분에 4년간 신나게 놀았어도 지식의 단물을 맛보았던 것은 감사할 일이다.

이제 여학생의 이야기도 하리라.

한 번은 교내 학보에 여학생의 머리에 비듬이 있는 것을 처음 본 남학생의 수필이 올라왔다. 그때 그 남학생은 비듬을 미원이라고 표현했는데 음식에 미원을 넣을 때마다 그 남학생의 글귀가 생각나 그때부터 미원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여학생은 음식을 먹으면 몸속에서 자연 분해되어 화장실에도 안 가는 줄 알았겠지. 하긴 그렇게 몸의 구조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자는 10분에 한 번씩 방귀를 뀐다는 사실을 알면 그 남학생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물론 대학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완전 변신한 여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스스로 패션감각들을 익혀가는 중이던 그들은 옷차림도 촌스러웠다. 사실 옷 구입할 돈도 충분치 않았고. 대학 입학 전에 친구들과 몰려가서 미용실에서 처음 했던 소심한 파마. 생머리 단발 위에 뽀글한 라면 한 덩이를 얹은 듯한 그 파마이름은 핑클이었다. 그렇게 덜 끓인 라면 한 덩이는 또 어찌나 강력하던지.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신입생들은 다들 어엿한 대학생으로 다듬어져 갔다.

그때는, 지나고 보니 최고의 시간이었던 건데 다들 마음의 고민을 많이 안고 살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하였다.

'방황을 하되 침몰하지는 마라'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자유를 누릴 연습을 해야 하는 건데. 어찌 감옥에서 자유를 맛보게 하랴. 처음 맛본 자유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우 침몰하기는 면했지만 인생의 항해를 떠나기 전에 항구에서 어떻게 준비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들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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