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슈냑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이 있다.
오늘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거의 없는 낮, 조용한 창밖으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는지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거세지더니 나중에는 발악을 한다.
그칠 줄 모르는 아이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마음이 아파온다.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하였기에 저렇게 울리나 싶다.
오랜 전 학창 시절에 안톤 슈냑의 수필을 읽었을 때 어린아이가 우는 것이 왜 슬픈 지 이해를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의 <슬프게 하는 것들> 이 전부 다 나를 슬프게 한다.
그에 더하여 올해 벚꽃조차 빗물에 처연히 떨어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코로나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없이 거의 한 달 넘게 집에 있게 된 이 시간들도 정말 나를 슬프게 한다.
며칠 전에도 울던 아이를 보았다.
쓰레기를 버리러 아래층 문으로 나서는데 놀이터 쪽에서 5살 쯤 보이는 남자아이가 목청이란 목청을 다 쏟아내며 울고 있었다. 아이가 뭔가 고집을 부렸겠지 싶고 또 대개 엄마들이 근처에 있는 경우가 많아 그냥 모른 척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서는 동안에도 아이는 계속 울었다.
아이 옆에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 아가야 왜 울어? "
아이는 내가 관심을 보이자 꺼억꺼억 울던 것을 조금 그치며
"아빠가... 아빠가 없어요."
"아빠가 없어?"
"으응 응응... 엉엉 아빠아 아빠아~"
아이는 내가 달래자 울음소리가 조금씩 사그러 들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저 앞에서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아이 아빠였다.
아파트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일부러 아이가 못 보게 숨었던 것인지... 어쨌든 아이는 아빠가
나타나자 갑자기 울음소리가 다시 커졌다. 아파트 문을 돌아서며 보니
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 서서히 울음을 그쳐 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아파트 어딘가에서 울리던 아이의 울음이 뚝 그쳤다.
순간의 정적.
창을 통하여 저 멀리 고층 아파트들이 자작나무 숲처럼 빽빽이 솟아 있는 것을 본다.
겉은 저렇듯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데... 무색무취의 전염병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보이는
길거리에 그냥 갖다 놓은 관들과.... 한꺼번에 땅에 파묻히는 하얀 장례행렬들.
그런 삶의 허망함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나의 눈.
재작년 오월에 엄마의 시신이 불구덩이 속에서 나왔을 때 어느 쪽 다리인지 한 개의 대퇴골 뼈가 하얀 가루 속에
불쑥 솟아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 하얀 뼈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저 수많은 관속에 누인 시신들을 생각하는 나의 슬픔의 빛깔도 무색이다.
꽃들도 아는 것일까.
인간 세계에 내린 보이지 않는 질병을.
지나치게 혼자 화려하게 피는 것이 부끄러웠을까. 그러나 팝콘이 튀듯 부풀어 올랐던 벚꽃들이 사라진 자리에
푸른 이파리들이 송송 나뭇가지들을 타며 기어오른다.
병아리들이 파릇하게 솟은 잔디 위를 걸어 다니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슬프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아이들은.... 아이들은 행복하게 웃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