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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Nov 11. 2015

 # 마르다와 마리아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못 믿고

요한 복음 11장 17절-44절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은지 4일,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한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 하시니 마르다는"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아날 줄 아나이다."라고 한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하시며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다.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때 마르다는 자매 마리아를 부르러 나가고 마리아는 예수께 가서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아니 하였겠나이다."  (중략)

예수께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마르다가 말한다."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때 예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하략)

  



 마리아는 이전부터 예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여자였고 마르다는 예께 대접하고 싶어서 음식을 만들면서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원망했던 여자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마리아는 집에 앉았고 마르다는 예를 맞이하러 먼저 나갔다.  정말 행동하는 크리스천을 보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반면 마리아는 말씀을 좋아하며 언니는 도와주지도 않고 예의 발치에만 앉아있던 여자다. 마르다의 입장에서 보면 좀 얄미운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께서는 말씀을 듣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마르다에게 가르치셨다.(누가복음 10/ 38-42)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반응을 보자.

마르다는 '곧' 나갔다.

그리고 예께 자기 집에 있었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예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다 주실 줄 안다고 말한다.  엄청 믿음이 좋아 보인다. 그래서 예께서 네 오빠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신다. 이때의 대답은 정말입니까. 빨리 살려주세요. 엄청 기뻐요. 그랬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마르다는 좀 뒷북치는 대답을 한다. 그럼요 마지막 날에 부활하겠지요.

마르다는 믿음이 좋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좀 헷갈리는 여자다.

그러자 예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마르다야 너 나 믿는 거 맞아?

께서도 마르다의 믿음이 불완전함을 아신 듯하다.

이때도 마르다는 예의 말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또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럼요 저는 주께서 그리스도시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어요.

마르다는 내가 보기에 추상적으로 주님을 믿는 것 같다. 바로 앞에 예께서 계시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께서 마리아를 불러 오라 하신다.

이 쯤에서 보면 예께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보았던 자리에서 마리아를 기다리신다.

마르다는 예께서 온다는 말을 듣고 나갔고, 마리아는 예께서 불러서 나갔다.

마리아는 '급히' 나갔고 예를 보자마자 그 발 아래 엎드린다.


여기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예수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가 난다.

마르다는 행위의 열심으로 마리아는 예수를 경외하는 태도로.

마리아 역시 주님이 자기 집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셨을 것이다.

 예께서 눈물을 흘리시고  비통해하신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들 곁에 서신 주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죽음 앞에 겁은 내지 않는 인간은 없으리라.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한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자신의 죽음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한다.

그러다가 가까운 사람들이 죽으면 고통에 차서 울부짖는다.

혈육을 잃은 슬픔에 빠진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면서 예께서는 당신께서 왜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지를  생각하신 것이 아닐까.

인간의 죄의 대가. 이 세상에서 치러야 할 대가.

그 죄가 너무나도 커서 십자가에서 피의 대속을 치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비통함이 아니었을지.


이제 또 마르다를 보자.

무덤 앞에서 마르다는 또 뒷북을 두둥 치고 만다.

께서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하실 때 마르다는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시체를 어쩌시려고요?

뭐 이런 의미의 말인 듯하다. 그러나 마리아는 말이 없다.

 앞에서 마르다는 예를 믿는다고 고백해놓고 예께서 기적을 행하시려는 자리에서 믿지 못해 재차 묻고 확인하는 것이다.

께서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쯧쯧..


 열심히 행동하며 예와 많은 대화를 했지만 뭔가 부족해 보이는 마르다와

행동은 늦지만 말씀을 소중히 하고 예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기적을 행할 것을 믿는 마리아와.


나는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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