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구원자가 주는 천국 티켓

크러스너 호로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2025 노벨상 수상

by 미셸 오

우선 책의 제목이 눈길을 확 끌지 않아?

이 책은 사회주의 체제 말기의 헝가리 농촌이 배경이야. 그런데 이 마을은 쇠락해가고 있었어. 아니 이미 구제할 수 없을 만큼 퇴락해 버렸어. 소설의 첫 장을 넘길 때부터 어둡고 침침하지.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절대 손을 놓지 못할 거야.

일단 이번엔 소설이니까 소설의 6요소를 가지고 말해볼게.


첫째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잖아? 이 소설의 주제는 일단 무거워. 희망도 미래도 없는 절망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이 소설의 구성이야.

처음엔 수미상관적이라고 생각했어.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의 반복이었거든. 그런데 내가 탱고를 잘 몰라서 탱고를 찾아봤어. 한 쌍의 남녀가 몸을 날렵하게 흔드는 경쾌한 춤인데 앞으로 여섯 스텝 뒤로 여섯 스텝을 밟는 춤의 형식이더라고.. 이는 전진과 후퇴를 한 개의 리듬 안에서 반복하는 움직임인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조야. 작가가 그 탱고의 구성을 소설에 가지고 왔던 거지.

1.2.3.4.5.6 < 탱고춤과 구원자의 출현> 6.5.4.3.2.1 이런 순서인거지. 피라미드형처럼.

시작부터 서서히 1장에서 6장까지 간 후 시점이 바뀌면서 어린아이가 서술자가 되어 나타나. 이 부분이 다음 6단계로 가는 전환점이 된다고 생각해...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한 남자 이리미아시를 기다리면서 탱고를 추는 장면과 바깥에서 소외된 10살 난 아이의 자살이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어.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죽는 장면 만이 뚜렷하게 보였다고나 할까.

문체는 긴 호흡을 가졌어. 시시콜콜하게 묘사하는 한 개의 장면. 한 사람의 묘사가 지겹지 않았어. 그것이 작가의 실력이랄까. 빠져드는 문체였어.


이제 소설 구성의 3요소 인물. 사건. 배경으로 들어갈 볼게.

인물들은 다 무기력하고 음울하고 뭔가에 다 중독되어 있어. 성중독. 돈중독. 생각중독. 알코올 중독..

그들은 모두 자기 생각만 해. 주변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지. 이 죽어가는 마을에서 어른들의 관심이 필요한 10살 어린아이 에슈티케는 소외된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당하는 가장 가련한 인물이었어.

그래서 아이는 지옥 같은 이 삶을 떠나 천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 것이지.


그리고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책의 배경은 늘 어둡고 우중충해.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새로 떠나는 길 위에서도. 비는 멈추질 않아. 되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경우는 있어도 말이지. 이런 마을에 내동댕이 쳐진다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견디지 못할 만큼 더럽고 우울하고 말 테지.

그리고 또 하나. 거미줄이야. 어느 집이든 거미줄이 계속 줄을 치지. 사람들이 질겁을 하고 걷어내봤자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는 길은 질척대는 진흙이고 말이야.

배경은 주제를 암시하잖아. 빗살은 세지거나 약해지거나를 반복할 뿐. 지속적으로 내리는 비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내면을 그리는 것 같아. 마을에는 해가 뜨지 않아.. 계속 비만 올 뿐이지. 그러므로 이 쇠락해 가는 마을은 이제 곧 있으면 비와 먼지에 섞여 곧 사라질 것 같아.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아.


자 이제 사건을 말해볼까 해.


사건은 이래.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이 마을에 이리미아시가 나타날 거라고 소문이 돌아.

그는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으로서 마을 사람들은 그가 부활했고 그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지. 그가 일자리를 주고 그들을 살게 해 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를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 술집에서 모두 탱고를 춰. 마치 집단 도취상태에 걸린 것처럼 말이지.

그때 한 가여운 여자아이 에슈티케가 술집 문 밖에서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지만 그 아이를 구원해 주는 어른은 한 명도 없었어. 이 사건을 통해볼 때 이미 마을 공동체는 도덕적으로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런데 이 구원자가 페트리나와 마을에 들어서면서 에슈티케가 죽은 것을 보고는 술집에 나타나 장황한 설교를 시작해. 먼저 그는 아이 에슈티케의 죽음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부추겨. 그리고는 마을의 몰락과 사람들의 절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이 비극적인 상황을 끝장 낼 수 있다고... 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 살 길을 마련해 줄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 연설에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사로잡혀서 자발적으로 돈과 삶의 통제권을 맡기게 돼.


하지만 소설의 나중에 드러나듯.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는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첩자였던 거야.

이 부활자. 혹은 구원자로 나타나는 이리미아시와 마을 사람들의 상황은 신학적으로도 겹쳐 보여.

그래도 예수는 진실이지만 이 구원자는 가짜야.

예수는 죄를 대신 짊어지지만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부추겨서 기를 죽이지.

예수는 진짜 부활했지만 이 인물은 죽은 적이 없어.

암튼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남은 돈을 그에게 탈탈 털어주고 그를 믿고 마을을 떠나.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이 그들이 원하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죽어가는 마을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들이 부활자에게 돈을 주고 소개받은 곳(제2의 삶의 터전)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리라는 확신은 안들어.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결국 마을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간 곳 역시 더욱 통제되고 무기력한 삶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어.


한편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

알코올 중독자 의사야. 그는 마을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주변의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사람이야. 떠나지 않은 그가 떠난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보장은 없어. 여전히 거긴 비가 내리고 거미줄이 쳐지고 의사는 아예 문을 닫아걸고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해 버리지. 그렇다면 그가 기록하는 것들의 의미는 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의미없는 기록일 뿐...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안 좋았어.

이렇게 우울한 책이 있을까.

희망 없는 삶에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 마을 사람들에게 조작된 미래를 보여주고 그 기대를 저버리는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걸까.

결국 이 책에서 탱고춤은 해방의 몸짓이 아니라 반복의 형식이며 이리미아시의 거짓된 연설은 소설의 끝에 등장하는 원처럼 순환을 지속시키는 장치에 불과했어.


그래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이 어둡고 음울한 세상에서 구원자는 없다는 것일까?

만일. 이 작품이 써진 배경을 가지고 논한다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을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 절망적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주제와 구성과 문체와 사건과 배경이 유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면 정말 뛰어난 작가의 작품임을 깨닫게 되더라. 아마도 내가 읽었던 많은 소설책 중에 탑 10에 들 거 같아.

완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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