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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Dec 16. 2015

#빛바랜 사진 한 장


어느 날 카톡에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대학 동아리 남녀 선후배가 학교 축제 때 찍은 사진이었다.

1987년에 찍은 사진인데 어찌나 젊고 순수한지....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마음을 느꼈다.

대학교 식당 옆 반지하 동아리실 창문 앞에 화단이 있고 그 화단에는 하얗고 노란 팬지꽃이 분홍색 , 흰색 장미와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마치 그들의 젊음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 앞에 파란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 선배와 동기 남학생이 여선배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

그땐 예쁘고 젊었었구나. 저렇게 꿈을 꾸듯 웃는구나.

지금은 다들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른 사람과 엮어져 살아가지만... 그때 그 순간들의 기억은 추억이라 아름답게만 보인다.

얼굴의 주름이 다 펴지도록 저렇듯 기분 좋게 웃어본지도 오래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은 비록 선후배간이지만 소설 <칸나의 뜰>에서 나온  연인처럼  보일 수도 있으리라.

내가 그 사진 속의 여선배에게 브런치에 사진을 올려도 좋으냐고 물었으나 남편 모르게 해 달라고 했다.

남편이 밴댕이 소갈이라고.

그러나 파란 물방울 원피스 선배는 같은 동아리 선배와 결혼했다.

비록 사진은 올리지 않지만 그 사진 속에는 그 시절의 우리들의 젊음이 함께 녹아있다.

빛이 바래서 눈도 입도 코도 흐릿한 사진.

그 사진을 한참 보고 있자니 팬지꽃도 장미꽃도 다 웃는 거 같다. 그 화단 아래층 동아리실.

그곳에서 우리는 1985년  4월인가 5월에 신입생 환영회를 가졌다.

내가 속한 동아리는

두 개 대학이 연합된 동아리로 매우 친밀했던 모임이라 생각한다.

1학년 새내기 때 B대 동아리실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었는데 2학년에서부터 4학년까지 남녀 두 개 대학 선배들이 40여 명이 넘게 모였다.  신입생들에게 떡이며 과자며 음료수들을 잔뜩 먹여놓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티를 못 벗은 신입생들에게는 좀 짓궂은 게임이었다.

가령 오랜만에 만난 부부들이 침실에서 나누는 내용의 각본이다. 남녀 파트너가 된 새내기들은 부부처럼 그 각본대로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2학년 남녀 선배들은 신입들 앞에서 아주 능숙하게 연기를 하며 시범을 먼저 보인다.


남자: 여보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나의 이 가슴에 꽉 안겨봐.

여자: 아잉~


 하고 애교를 떨며 상대방 남학생에게 안긴다. 이런... 각기 여자끼리 남자끼리만 살다온 아이들에게 서로에게 안겨보라니.... 새내기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들은 서로 파트너가 되어 얼굴이 벌겋게 돼가지고 글에 적힌 대로 연기하며 쩔쩔매고 선배들은 재밌다고 낄낄대었다.

또 있다.

빼빼로를 서로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어느 팀이 가장 짧게 남았는가.  그러려면 서로의 입술이 닿는 게임.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의 1학년들은 얼마나 민망하고 가슴이  부풀었던지.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진하 해수욕장에 M.T를 갔던 일이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다. 기차의 규칙적인 바퀴 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은 알 수 없는 빛깔들을 품은 체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였다. 고등학교에서의 단체여행만 해 오던 1학년들에게 동아리 회원들끼리의 여행은 신비로운 나라에 가는 듯한 기대와 설렘을 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드넓게 모래가 펼쳐진,  소나무 숲과 해변이 잘 어우러진 한적한 곳이었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저녁해가 지는 해변을 거닐 때 바닷가에서  마른미역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아니 어쩌면 눅눅하게 절은  모래의 소금기가 소나무 숲의 이끼와 섞여 나는  냄새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걸어가며 보던  해안선은  해운대 바다처럼  세련되게 다듬어진 은 아니었다. 다만  투박하게 그어진 약간 비뚤 한 타원형  해안  저편에 가파르게 깎인  벼랑과 바위들이 보였다. 그 멀리 뵈던 바위 빛은 어두운 회색빛을 띤 체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

민박집의 밥은 기억에 없는 걸로 봐서 특별한 것은 없었나 보다. 그러나 조용한 바닷물 소리를 듣고 서로  이야기하고 산책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거 같다.

밤이 되어 선배들이 게임 화투를 칠 때 여학생은 방  한쪽 구석에 모여 앉아 게임을 했다.

그때 화투게임을 싫어한 남학생 두어 명이 여학생들과 함께 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벌칙으로 등 바닥을 두드리면 꺄르륵 거리고 놀았다. 겨우  두세 시간을 잔 듯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사진을 찍고 낮에는 기타를 치며 같이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이 없는 해수욕장을 걷고 또 모래를 헤집었다.

그 순간 해수욕장의 바다가 주는 위안은 참으로 크고 깊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을까.

 그때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지만 누군가는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모래 해변에 사진을 찍을 때 바다는 알고 있으리라. 누군가의  마음속에 사랑의 설렘도 있었으나 애써 감추었다는 것을.

진하 해수욕장을 떠나올 때 <무진기행>에서 무진을 찾아와 사랑을 하고 떠나던  주인공처럼 어떤 이는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마음속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 누구나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추억만이 시간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 병상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평생에 내가 번 재산을 가져갈 도리가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행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줄 것이다."


시간의 축적 속에서 오늘 다시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빛나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했던 추억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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