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서 발목 삐어 들어간 곳이 다이어트 전문 한의원

by 유로운자

명절 연휴 시작 전날, 시무실 공기는 해방감으로 가득했다. 올해처럼 긴 연휴는 오랜만이라 팀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소중한 시간을 미리 계획했다. 앞뒤로 연차를 붙여 외국여행을 가기도 하고, 서울에 남아 호캉스를 가는 등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고향이 서울이어서 딱히 갈 데가 없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오직 고향으로 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조금 일찍 퇴근하는 것이 허용되는 날이라 나는 눈치껏 6시 KTX 티켓을 예매했다. 매해 늘어가는 것은 예매의 기술! 명절 연휴기간 기차표를 살 수 있는 기간에는 손가락 운동까지 따로 하며 티켓을 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다른 부서에는 티켓을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서울을 지켜야 한다는 푸념이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결재 서류를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열어 ktx 모바일 티켓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평소보다 빵빵한 백팩을 메고 회사를 나섰다. 회사에서 나눠준 명절 선물도 잊지 않았다. 직장인에게 명절이란, 잠시나마 이 지긋지긋한 빌딩숲을 벗어나 따뜻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부모님이 차려주신 푸짐한 밥상 앞에서 다른 불편한 점은 모두 사그라든다. 그 이후 들려올 잔소리는 맛없는 반찬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꿀꺽 삼키면 그만이다.


따뜻한 집 밥 한 끼로 그동안의 피곤함이 모두 눈 녹듯 사라지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무실을 나서 잠시 역삼역으로 갈까, 강남역으로 갈까 고민하던 나는, 조금이라도 서울역 쪽에 가깝다는 생각에 강남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콧노래를 부르며 양손 가득 선물을 든 사람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어제 이발도 하고, 신발도 단정한 스니커즈를 신었다. 살짝 커서 헐렁거리는 것이 불편해 평소에는 잘 신지 않는 신발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는 신발을 신고 가서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낫다.


강남역 12번 출구로 가는 길. 늘 사람들이 많은 길이지만 명절을 앞두어서 그런지 더 북새통이었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꾸물거리면 안 되는 KTX 시간이라 마음은 살짝 조바심이 일었다. 강남역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바로 앞에 마무리되지 않은 보도블록 공사 구간이 눈에 띄었다. 최대한 피해서 지나가려고 했는데 한순간 내 발이 헐렁한 스니커즈 안에서 중심을 잃었다.


"앗!" 하는 외미디 비명과 함께, 내 몸은 중력에 이끌려 인파 한가운데로 고꾸라졌다. 내 휴대폰과 선물 가방이 쿵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나는 귀성길에 바쁜 그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넘어진 고통보다 창피함이 먼저 온몸을 덮쳤다.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섬주섬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잔혹한 현실이 나를 덮쳤다. 한 걸음을 떼자마자 왼쪽 발목에 찌릿하는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미 발목은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걷기 위해 힘을 싣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가까운 한의원을 찾았다. 예전에도 발목을 삐었을 때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니 금세 좋아진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한의원을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침 바로 옆 건물에 한의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강남역이라 그런지 각종 병원이 몰려있었는데 그 건물이 마치 구원의 장소로 여겨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그 건물로 향했다.


한참이 걸려 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해서 내리니 바로 한의원 로비로 이어졌다.

"저기요. 제가 발목을 심하게 삐어서요. 침 좀 맞을 수 있을까요?"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리셉셔니스트에게 호소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다이어트 전문 한의원이에요. 일반 진료는 하지 않습니다."


헉, 다이어트 전문 한의원이라니.


나는 순간 주변을 돌아보며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한의원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왔는데, 내가 잘 못 찾아왔나 의심이 들어 다시 간판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겨우 왔는데 침을 맞을 수 없다는 생각에 황당함과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이어트를 위한 한약이 배송되기 위해 30박스나 데스크 위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만 나에게 남긴 채 바쁜 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버틸 힘도 없었던 나는 아픈 발목을 절뚝이며 겨우 그곳을 나왔다.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KTX는 이미 고향을 향해 달리고 있겠다는 것을.


갑자기 자책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강남역의 수많은 시선, 다이어트 한의원의 냉대, 왜 헐렁한 신발을 신었으며, 오늘따라 왜 강남역으로 걸어 내려온 건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위로받으려 했던 나의 귀경길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결국 나는 명절 연휴 내내 아픈 발목에 캐스트를 낀 채로, 홀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서울 집에서 외롭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께는 영상통화로 캐스트를 낀 발을 보여드리며 죄송한 말씀을 전해야 했다. 아들이 올 날만 고대하고 푸짐한 음식을 준비하셨을 텐데.


나의 부주의가 이런 결말을 가져왔다. 그날의 황당하고 창피하고 서러웠던 기억은 강남역 12번 출구를 지나갈 때마다 생각이 났다.


"그 다이어트 한의원은, 살 빼는 사람들로 여전히 잘 되고 있을까?"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2화겨드랑이 땀으로 연파랑 셔츠가 군청색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