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드랑이 땀으로 연파랑 셔츠가 군청색이 됨

by 유로운자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하늘을 찔렀다. 지난 몇 달간 영혼을 갈아 넣은 우리 회사 대표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50주년 기념 팝업스토어가 오픈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성공적인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가장 아끼는 코발트블루 셔츠를 입었다. 몇 달을 벼르다 지난주 세일을 해서 산 고급 셔츠다. 선명하고 산뜻한 색깔이 성취감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갔다.


팝업스토어 내부는 완벽했다. 방문객들은 입구에서부터 3면 스크린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스토리텔링 영상에 환호할 것이다. 메인존에서 바닐라강 다리를 건너며 설레는 표정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퍼즐게임을 하며 성취감과 재미를 맛본 후, 굿즈 코너에서 직접 에코백을 꾸밀 수 있다.


특히 내가 가장 공들인 디저트존은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로 방문객들이 수십 가지의 토핑을 직접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토핑을 조화롭게 올리며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공간이다. 다 만든 창작콘을 들고 포토존에서 셀피를 찍고 해시태그를 달아 온라인에 업로드하면 팝업스토어 투어가 완성된다.


드디어 오픈 시간에 맞춰 관객들이 입장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업무를 이행했고, 관람객들이 안전하게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나는 22도로 유지되는 쾌적한 실내에서, 담당자로서 이 모든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성과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체험 인증 피드를 보며, 마케터로서의 짜릿한 성취감을 만끽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오전보다는 방문객들이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은 디저트로 분류되니까 점심시간 이후에 많이 오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전기가 울렸다.


"외부 경품 룰렛 부스 아르바이트생이 기침이 심해 코로나로 의심됩니다. 급하게 퇴근 조치시켰으니 허 주임님. 지금 30분만 나가서 호객과 룰렛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인력을 급히 알아보고 있습니다."

라는 손 팀장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시원한 내부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오가 가까워 뜨거운 햇빛이 직각으로 쏟아지는 팝업스토어 앞마당. 우리 회사의 50주년 행사를 알리는 동시에 대기관객들을 위한 룰렛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다리는 관객분들은 이미 나눠드린 장우산을 양산대신 쓰고 열기를 피하고 있었지만, 진행자들은 손에 우산을 들고 이벤트를 진행할 수 없는 관계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5분 만에 등줄기가 눅눅해졌고, 곧이어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식품기업의 팝업 행사에서 앞치마는 필수라서 더위를 두배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톤을 높여 외쳤다.

"자, 룰렛을 돌리시면 저희 브랜드 50주년 기념 팝업 스토에 내에서 쓸 수 있는 코인을 드립니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니 이쪽으로 오세요."


손을 들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손짓을 하려는 찰나,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각이 겨드랑이를 타고 느껴졌다.


'아, 안돼...'


나는 속으로 외치며 내 겨드랑이 쪽을 슬쩍 바라봤다. 밝고 산뜻했던 코발트블루 셔츠가, 딱 그 부분만 짙은 남색으로 변해있었다. 마치 바다에 떠있는 두 개의 섬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처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누가 봐도 땀에 흠뻑 젖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몸에 붙였다. 룰렛 참여자들에게 호응도 유도해야 하고, 관심은 보이지만 그냥 지나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홍보부스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했다. 하지만, 팔을 올려 동작을 크게 하는 순간 나의 겨땀 섬 두 개가 이 성수동 한복판에 적나라하게 노출될 판이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팔꿈치 아래만 움직였다. 동작이 작아지니 목소리도 그만큼 볼륨이 줄었다. 어깨까지 차있던 자신감은 온 데 간 데 없고 마치 열정 없이 로직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보였다.


'아, 10분 만에 이러면 어떻게 남은 20분을 버티지? 대체 인력은 아직인가?'


긴장감 속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때였다.

마케팅 본부장님이 수하 몇몇을 데리고 매장 안에서 이쪽으로 나오고 계셨다. 그와 동행하던 노 과장님은 그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잰걸음으로 내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왜 그래요. 허주임님. 왜 그렇게 팔을 붙이고 얼어있어? 본부장님이 열정이 안 느껴진다고 하시잖아"


노 과장님은 내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이크를 넘겨받아 직접 호객행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벌게진 내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노 과장님은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열정! 열정! 마케팅 직원은 열정이 생명입니다."

그리고 얼른 본부장님과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나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땀에 절은 채 열정 없는 직원으로 낙인찍혀버렸다.


바로 그때, 손 팀장님의 내 어깨를 툭 치시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대체 인력 배치됐어요. 좀 들어가서 쉬세요."


분명 손 팀장님은 멀리서 이 모습을 봤을 테고, 점점 짙어지는 나의 겨드랑이 섬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교대 인력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었다. 거울 속 나는 정말 꼴불견이었다. 팔을 붙이고 있던 게 무색하게, 땀자국은 거의 가슴팍까지 넘어와 두 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 될 뻔했다. 셔츠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탄생된 셈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옷장에서 파란색 계열의 셔츠를 모두 깊은 서랍 속에 봉인했다. 특히 흑역사의 장본인인 코발트블루 셔츠는 바로 옷 수거함에 넣어버렸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 파란색 셔츠를 입고 지나가면 그날의 굴욕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걱정된다. 오지랖을 발휘해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어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혹시 이 색깔 셔츠... 땀나면 겨드랑이가 엄청 진한 색으로 변하는 거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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