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일함이 불러온 길거리에서 슬리퍼 찢어진 사건

by 유로운자

사람들에게는 애착템이라는 것이 있다.

그 대상은 명품 백처럼 삐까번쩍한 물건일 수도 있고, 커스터마이징 한 스니커즈가 될 수도 있다. 어릴 적부터 사용한 애착 이불일 수도 있고, 최근 유행하는 라부부 아트토이처럼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신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애착템은 지극히 평범하다. 바로 나의 커리어와 세월을 함께 해온 사무실용 삼선 슬리퍼였다.


이 투박한 고무 슬리퍼는 내가 지금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신게 된 것인데, 내 발 모양에 맞춰 길들여지며 업무에서 오는 고단함과 피로를 가장 포근하게 감싸주는 전우였다. 출근 후 스니커즈를 벗고 책상 아래에서 슬리퍼를 찾아 바꿔 신는 일은 마치 업무의 성스러운 시작 의식 같았다. 겉모습은 색이 바래고 허름해졌지만, 퇴근할 때 갈아 신는 운동화보다 오히려 더 익숙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문제는 그 애착에서 온 안일임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부턴가 슬리퍼 커버와 발바닥을 잇는 연결 부분이 실금처럼 희미하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아, 이거 바꿔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매번 '실내에서만 신는 건데 뭐, 조금만 더 신다가 바꿔도 되겠지.'라고 합리화했다. 전에 선물 받은 크록스 슬리퍼로 잠깐 바꿔보기도 했지만, 내 발에 맞춘 듯한 이 녀석만큼 편하지 않아 다시 꺼내 신어오게 되었다. 내 안일함은 슬리퍼의 수명을 억지로 연장시켜 왔고, 그로 인해 언제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이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동료들과 사무실을 나왔다. 조금만 늦어도 붐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점심시간을 많이 허비해야 했기에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회사 뒤 밥집 골목으로 향하는 길. 발밑을 보니 오늘따라 스니커즈로 갈아 신는 것을 깜빡했다. 매번 식사 후 동료들과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함께 하기 때문에 꼭 운동화로 갈아 신고 나오는데, 오늘따라 잊은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산책은 건너뛰지 뭐.'라고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동료들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코너를 돌아 길을 건너려는데 동료 한 명이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야, 차 온다. 조심!"


나는 본능적으로 차를 피하기 위해 몸을 '휙!'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 순간, 이미 실금이 가있던 슬리퍼 연결 부분에 내 발의 거대한 힘이 작동해 치명타를 가했다.


"찌지직-"


애처로운 소리와 함께 미싱으로 연결된 발바닥 부분과 슬리퍼 커버 부분이 0.2cm 정도를 남기고 처참하게 벌어졌다. 그 순간의 민망함이란 표현하기가 어렵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며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동료들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 허 주임. 슬리퍼... 하하하... 결국 찢어졌네."


"뭐야, 괜찮아? 어떡하냐."


동기들은 위로 반 놀림 반으로 웃으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슬리퍼가 완전히 벗겨지진 않았지만 흰 양말을 신은 발 등 부분이 훤히 드러난 슬리퍼를 바라보자니 꼭 발가벗겨진 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최대한 태연한 척 걸음을 이어가려고 애썼지만 나는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걸어야 했다.


'조금 만 더'라고 생각하며 눈앞에 보이는 식당 쪽으로 절뚝거리며 가는데. 나의 애처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은 연결부위마저 하중을 이기기 못하고 결국 완전히 찢어져버렸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나의 흰 양말이 덩그러니 드러났다. 뜨겁고 거친 아스팔트의 질감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의 신경으로 전달되었다. 동기 중 한 명인 장준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 야, 우리 먼저 식당 들어가 있을 테니까 내 신발 신고 어디 가서 슬리퍼 하나 사와라."


길바닥에 맨발로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보며 동료들은 식당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주태가 장준의 스니커즈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잠깐의 시간이 나에게는 천년만년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찢어진 슬리퍼를 벗어 손에 들고 장준의 신발을 신었다.

이 안도감이란.


나는 최선을 다해 뛰어 근처 다이소로 향했다. 재빨리 가장 튼튼해 보이는 슬리퍼를 집어 들고 계산을 했다. 나름 애착템으로 여겼던 삼선 슬리퍼는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어떤 물건에 애착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카톡이 울렸다.


'네 것도 시켜놨으니까 빨리 와.'


나의 민망함 앞에 웃던 녀석들이지만, 이럴 때 보면 또 동기 만한 전우가 없다.


이 사건은 나에게 뼈아픈 진리를 새겨주었다.

슬리퍼는 절대 실외용 신발이 될 수 없다는 교훈! 실내화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아스팔트를 맨발로 디뎌보며 제대로 깨달았다.


또 안일함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점! '괜찮겠지' 하고 미뤘던 작은 게으름이 결국 길거리를 맨발로 서게 하는 민망함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나는 해지거나 찢어질 조짐이 보이는 물건은 단호하게 교체하거나 수선한다. 두 번 다시 애장품이라는 이름의 배신이나 맨발의 굴욕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3화길거리서 발목 삐어 들어간 곳이 다이어트 전문 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