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 오더 닉네임이 부른 참사 또는 기적

by 유로운자

청명한 하늘이 유난히 높은 주말 오후.

최근 동료에게 선물 받은 스타벅스 음료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행복 호르몬인 햇빛을 좀 더 오래 쬐기 위해, 일부러 집에서 먼 곳에 위치한 카페로 걸어가기로 했다.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소소한 행복감에 발걸음이 가벼웠고 따스한 햇살에 기분 좋은 에너지가 넘쳤다.


일주일 내내 숨 가쁘게 달려온 나에게 주말 오후의 여유는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가뭄의 단비였다. 에어팟을 끼고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주말 오후 거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내 플레이리스트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발라드가 많다. 특히 허각 님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Hello'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아'는 퇴근길 지친 나를 위로해 주는 주문과도 같았다.


내가 가수 허각 님의 열렬한 팬이 된 건 2010년, 그의 목소리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던 오디션 프로그램 시절부터였다. 처음에는 나와 같은 허 씨 성을 가졌다는 단순한 이유로 관심이 갔지만, 경연마다 그의 사람 냄새나는 스토리와 탁월한 가창력은 그를 계속 응원할 이유로 충분했다. 내가 응원하던 사람이 1등으로 결정되던 그날. 나는 마치 내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었다. 같은 성씨를 가진 보통사람이 무명의 시간을 딛고 우뚝 선 모습은, 나에게 단순히 음악적 감동을 넘어 자랑스러운 롤모델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허각이라는 이름은 내 일상에 밀접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 앱의 닉네임까지도 '허각'으로 지정해 놓았으니 말 다한 거 아닐까. 닉네임이 불리면 주변 테이블 사람들이 고개를 슬쩍 들어 혹시나 하며 쳐다보는데 그때 내가 나타나 그들의 기대에 찬물을 쫙 끼얹는다. 죄책감 없는 유쾌한 일탈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 작은 장난을 꽤 즐겼다.


카페에 도착하기 30초 전, 나는 자연스레 사이렌 오더를 켜서 커피를 주문했다. 앱은 바로 '허각 님의 주문을 5번째 메뉴로 준비 중입니다.(A-43)'라는 알림이 떴다. 카페에 들어가니 공기 중에 옅은 커피 향이 기분 좋게 감돌았고,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바닥 위에 따사로운 네모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기다리며 빈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내 차례를 알리는 스타벅스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각 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나는 당연히 내 음료라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바로 내 앞에서 진짜 가수 허각 님이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주변이 노이즈 캔슬링이 된 것처럼 조용해지고, 오직 내 심장 박동 소리만 온 우주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나와 진짜 허각 님, 그리고 파트너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어... 제 거 맞나요? 내가 머뭇거리며 묻자, 파트너는 컵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네. 허각 님 맞으시죠?"


그때 진짜 허각 님이 웃으며 난감한 듯 말했다.


"하하. 저도 방금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는데. 엄청 빨리 나왔다 싶었네요. 혹시 성함이 허각이세요?"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뱃고동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 둘 사이를 오가며 이 상황의 전말을 궁금해하는 듯했다. 평소에는 장난처럼 즐겼던 그 시선들이 지금은 나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머리 위로는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었고, 이 자리를 어떻게 모면해야 할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파트너가 영수증을 확인하고 말했다.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신 닉네임 허각 님이 맞으시죠? 이쪽 고객님 음료가 맞습니다."


나는 너무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허각 님께 진실을 말했다.

"아, 제 이름은 허저라고 합니다. 허각 님 너무 팬이라서... 죄송합니다. 하하"


뜻밖의 상황에 허각 님은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허저 님, 저는 저랑 동명이인이신 줄 알았어요. 같은 허 씨 시라니 반갑습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음을 틈타 사인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장 즐겨 듣는 노래의 가수 님을 언제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지금의 민망함은 감수할만했다. 창피함은 찰나여도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펜도 없고 종이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한 민망함을 무릅쓰고, 옆 테이블에서 묵묵히 공부하고 있던 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진짜 죄송한데, 펜 좀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잠시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지만, 그분은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필통을 뒤져 네임펜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복이란 말인가!


나는 그 펜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허각 님에게 내밀었다.


"제가 진짜 진짜 팬이거든요. 이 컵에 사인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허각 님은 나의 극성맞은 팬심과 용기에 감동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정말 대단하시네요. 같은 허 씨 팬에게 드리는 커피컵 사인입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컵 뚜껑에 멋지게 사인을 했다.

나는 고마움을 전하며 그 컵을 소중하게 받아 들었고, 펜을 빌려준 분에게도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그분의 필통 속에 펜을 넣었다. 귀인은 멀리 있지 않다.


허각 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곧 나왔고, 그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마자 주변의 웅성거림은 탄성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우와, 진짜 허각이었어요?", "사인 어떻게 생겼어요?" 하며 질문을 해댔다. 방금 전의 극심한 부끄러움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승리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료가 준 음료쿠폰이 나를 이 카페로 오게 했고, 나의 허 씨 성이 이런 재미난 상황을 만들게 했으며, 민망함을 무릅쓰고 빌린 펜 덕분에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기적 같은 하루를 만들 수 있었다.


트로피 같이 주어진 이 사인 컵은 나에게 성덕의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용기의 가치를 오래도록 상기시켜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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