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이 되기 전까지 나의 한글 사랑은 단순히 애국심을 넘어 자아실현의 하나였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그 순수한 열정에 브레이크를 걸어 잔혹한 강박으로 바꿔놓았다.
신입사원 시절, 내가 밤을 새워 만든 기획서는 언제나 사수의 손을 거치면 빨간펜으로 난자되어 너덜거렸다. 사수는 내용보다 맞춤법에 집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빨간펜으로 틀린 부분을 체크하며 '뵈요'를 '봬요'로, '웬지'를 '왠지'로, '금새'를 '금세'로 바꿔주는 등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내가 대학교에서 한글 사랑 동아리 멤버였던 사실조차 수치스러워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때는 그게 굴욕이라고 생각되고 생존을 위해 넘어야 하는 지옥의 허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고통의 학습 덕분에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한글 표기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료들은 기획서 제출 전 나에게 최종 검토를 부탁했고, 때로는 그들에게 내 사수보다 더 심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지금은 퇴사하셨지만, 내 첫 사수였던 황 대리님은 가장 감사한 선배로 내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 빨간펜 징벌 덕분에 독하게 노력했고, 그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 같아 내심 뿌듯하다.
나의 대학 생활은 '한글다듬이'라는 한글 사랑 동아리 입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대학교 신입생 OT날, 나는 교정을 돌며 어느 동아리에 들면 좋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동아리가 대학생활 4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입생들에게 동아리에 가입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날 나는 바른 한글 표기의 중요성을 필역하던 선배들의 강한 인상에 넘어가 '한글다듬이' 멤버가 되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한글 사랑 동아리에 가입은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선배들과 함께 축제도 준비하고 대자보도 쓰며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자나 일본어의 잔재가 남은 표기 대신 순우리말을 쓰자는 운동도 하며 나는 한글에 더 매료되었다.
그중 같은 신입생이었던 '정봉'은 논리적인 국문과 학우로 신입생들의 리더가 되었다. 특히 '오뎅'이라고 말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꼭 '어묵'으로 바로잡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늘 어깨를 펴고 다녔고, 서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글다듬이' 모임이 있는 한글날 저녁.
대학 졸업 후에도, 아무리 바빠도 한글날에는 한 번씩 모이자는 '정봉'의 의지로 우리는 지금까지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봉'은 전공을 살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여전히 매일 맞춤법을 체크하고, 교정교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정봉을 비롯한 두 명의 동기가 이미 자리를 잡고 나를 반겼다.
"어, 오랜만이다. 아직, 동윤이는 안 왔고?"
"어, 그래. 어서 와. 거의 다 왔대."
우리는 오랜만에 봐도 늘 봐오던 사이처럼 허물없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부를 전했다.
"어 그럼, 먼저 시키고 있을까? 오늘 날씨도 꾸리꾸리한데 막걸리 한 잔 어떠냐."
"좋지~"
먼저 안주를 시키기 위해 메뉴판을 살피는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육 계 장'
나는 이미 '한글다듬이' 멤버로 활동하던 피 끓는 대학생으로 돌아가 흥분했다.
"아 진짜 육계장이 뭐냐, 육계장이! 육개장이지. 이거 말해 줘야겠지?"
내가 즉시 웨이터를 부르려고 하자, 친구들은 만류했다.
나는 언성을 높여 '정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편집자인 네가 이걸 보고도 아무 말 안 하겠다고? 이런 오류를 보고도 말을 안 해주는 건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거야. 제대로 고쳐주면 이 식당에도 좋은 거지!"
정봉은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 오늘은 그냥 대충 넘어가자. 피곤하다~"
나는 오늘이 한글날임을 상기시키며 절대 방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웨이터를 불렀다. 친구들은 탄식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희... 모둠전이랑 어묵탕 하나 주시고요, 막걸리도 두 병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 '육계장'이요. 메뉴판에 오타가 좀 있는 것 같네요. '육개장'이 맞는 표현이거든요. 개 - 가이 - "
나는 최대한 돌려서 말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적했다. 그게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되고 옳은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이터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여기 '육계장' 아래 작은 글씨를 보시면, 설명이 있거든요. 이건 소고기 대신 닭고기 육수와 다리살을 넣어 끓인 저희 집만의 시그니처 메뉴입니다. 맵기 단계를 순한 맛에서 3단계까지 조절하실 수 있고요. '육개장'과 비주얼은 비슷하지만 내용물은 모두 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내 머릿속은 다 맞춰졌던 퍼즐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 할 말을 잃은 멍한 상태로 친구들을 바라보니 서로 키득대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정봉'또한 천장을 쳐다보며 내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방금 전까지 그를 방관자라고 비난했던 나는 사수에게 혼나며 배울 때보다 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정봉이 정적을 깨고 웨이터에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한글을 엄청 사랑하는 놈이거든요.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고치려 든다니까요. 하하하"
웨이터는 이런 일이 가끔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 메뉴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일부러 닭을 썼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육계장'이라는 이름을 붙이셨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그럼..."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을 떠난 후 나는 테이블에 바짝 엎드려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친구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기준에 틀렸다고 생각하는 글이 모두 편집의 대상은 아닌 거야. 너희들, 사실과 진실의 차이 알지.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거나 일어난 일을 말하고, 진실은 거짓이 없는 참된 상태, 본질적인 것을 말하잖아? 그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거야. 모든 진실은 사실을 포함하지만,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아, 뭔 소리야! 머리 복잡쓰~"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육개장'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는 진실이 아니었다는 거야.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게 교정보다 먼저라는 얘기지."
"아... 저 직업병...."
내가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정봉'은 친구들에게 나의 창피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메뉴판도 제대로 읽지 않고 참견한 오지라퍼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 문제의 고유명사 '육계장'도 추가 주문했다. 맴찔이들이 많은지라 1단계 매운맛으로 선택했는데도 꽤 얼큰하고 담백했다. 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더 입에 가져가며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편협하게 한글 사랑을 외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그동안 틀린 표현을 고쳐주면서 내 지적 우월감을 채우려고 했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한글은 포용력이 많은 언어다. 새로운 개념이나 외래어도 자연스럽게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글의 장점이듯이, '육개장'도 맞고, '육계장'도 가능하다는 점이 바로 한글의 매력이다.
한글은 모든 사람을 위한 언어이고, 다양한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정말 존귀하다.
한글 예찬론자 중 한 명으로서, '지적의 칼날' 대신 '이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메뉴판은 꼭 작은 글자까지 정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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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닭을 넣고 끓인 거라면 육계장이 아니라 닭개장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딴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