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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나 Jun 25. 2020

나는 기립근이 있는 남자가 좋다

이상형이란 존재하는가

“얼굴 뜯어먹고살래?”

40년을 넘게 살아온 지금 공중전까진 아니라도 산전수전을 겪고 나니 ‘이상’ 이란 단어가 무색해졌다. 이상형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말해지고 상상하며 그저 현실의 빡빡함을 잊을 수 있는 치트키 같은 것.

어렸을 땐 제법 친두들과 이상형 논의를 했던 것도 같다. 친구들은 대부분 손이 예쁜 남자라든지, 안경을 쓴 젠틀한 느낌의 남자라던지, 다정하고 배려가 넘치는 남자 라던지,  주로 외모와 성격에 대해 언급했는데 친구 중 한 명은 난 무조건 돈이 많은 남자가 좋다. 다른 건 시간 지나면 다 똑같아. 얼굴 뜯어먹고 살래? 라며 우리의 순정만화 같은 수다를 일말에 종식시켰다.



크리스햄스워스가 좋았던건 사실 외모보다 파파라치 샷에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아내를 어떤식으로든 놓치 않고 있던 모습이었다.


세속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난 그 친구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이상형을 얘기할 때 어느 정도 자신의 약점을 이면에 숨기기도 한다. 돈에 쪼들릴 때 돈 많은 남자가 좋다고 한다던가, 학벌에 미련이 남을 때 학벌 좋고 배경 좋은 남자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인정해버리는 것 같은 자격지심이 들통나는 것 같아 애써 고려요소에 넣지 않는 경향이 있다. 돈 많은 남자가 좋다고 얘기하던 그 친구는 휴학하고 다달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목돈을 모아 복학하기를 반복하던 친구였는데, 돈이 많은 남자가 좋아 라고 얘기하면서도 남자 친구의 유학자금까지 모으는 악바리였다. 정작 그 친구는 연애를 할 때 본인 입으로 말했던 돈 많은 남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어쩌면 그 친구에게 돈 많은 남자는 남자를 고르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를 세뇌하는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성격이 중요하다 늘 얘기하면서 소개팅남의 학교나 가정환경을 먼저 묻던 친구들보다 내 눈엔 몇 배나 멋있어 보였다.


이상형이란 존재하는가?



생각해보면 이상형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고려요소가 10가지라면 그 모든 항목이 10점 만점인 사람이 누구에게나 이상형이지 않겠는가. 돈은 많을수록 좋고, 머리는 똑똑할수록 좋고, 가정은 안정적이고 화목할수록 좋고, 키는 클수록 좋고 얼굴은 잘생길수록 좋고, 성격은 다정할수록 좋고, 목소리도 부드러우면 더 좋지 않겠는가. 간혹 너무 예쁜 여자는 별로다 라고 얘기하는 남자분들을 봤는데, 그건 정말 예쁜 여자가 별로이다가 아니라 예쁘면 성격이 나쁘다 던가 다른 남자들의 ‘껄떡거림’이 많아 피곤할 것 같다는 등의 예쁜 만큼 다른 항목들의 점수가 낮을 거라는 생각이 내재된 발언이다. 예쁜 데다가 현명하고 강단 있는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말하는 이상형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항목 중 일부를 포기하고서라도 절대 놓고 싶지 않은 항목이 무엇이냐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잘생긴 남자가 좋다는 의미



이런 의미에서 나의 이상형을 묻는다면, 조금 부끄럽지만 잘생긴 남자다. 앞에서 펼친 내 논리대로라면, 내가 못생겨서 유난히 남자의 얼굴에 집착한다는 결론이 나오겠지만(아니다. 아니라고! 진짜 아니거든?) 나에게 남자의 얼굴만 본다고 하는 것은 내가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 우리가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없는 것은 외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이유로 받는 반사적 이익으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같이 노력해서 얻는 나의 기여도가 인정되는 이익이 아닌 이상 누군가와의 인연에서 얻는 우월감이나 안도감은 오히려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한계가 된다. 굳이 이상형을 찾자면 같이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너와 함께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딸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아쉽게도 나에겐 언젠가 다리며 겨드랑이며 온통 털로 덮여 무뚝뚝해질 아들만 둘이지만, 뭐 아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 말이겠지. 엄마에게 이상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미치도록 좋아해 주는 사람도 아닌,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내가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해주는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거기에 욕심을 아주 조금 더 내자면, 잘 생기고, 거기서 조금 더 내자면 기립근도 있으면 좋겠다고.




<남자의 기립근 따윈 제대로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늘 잘 생긴 사람이 좋다고 얘기했는데, 손이 예쁘거나 코가 잘생긴 사람처럼 다들 상당히 구체적으로 얘기하길래 문득 떠오른 게 기립근이었을 뿐이다. 나이가 먹어도 나는 여전히 잘생긴 사람이 좋다. 나머지는 서로가 같이 하며 채워가는 기분이 나를 나이게 할 수 있는 강한 요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나이게 할 수 없는 어떤 안락함과 안도감에 나를 타협하며 살고 싶지 않다.>

기립근이 도대체 어디 있는 근육이름이냐 묻는 친구들이 많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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