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떠났다. 길게 줄 선 출입국 심사대에서 남편은 얼른 가라 재촉을 했고 아이는 몇 번을 뒤돌아보다 마지못해 들어갔다. 조기유학부터 해외취업까지, 20년 가까이 숱하게 겪는 이별이지만 아직도 내겐 익숙하지 않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보다 집에 돌아왔을 때 허전함이 더하다. 오고 간 횟수가 거듭될수록 큰애가 깜박 잊고 남긴 물건의 개수는 줄어들었지만 우리 세 식구 일상 속 그 애의 지분은 커졌다. 집안 구석구석 아이의 흔적이 숨어있고 냉장고 곳곳에는 큰애 떠나기 전 먹이려고 사놓았던 각종 식품들이 보인다. 유통기간이 지났을 때보다 더 아쉽고 아깝다. 재고로 남은 저것들을 혼자 먹어치울 때마다 나는 큰애를 떠올리겠지. 그럴 때면 유독 입맛이 떨어져 한입 먹는 게 고역이다.
보름 전쯤, 미국 현지시간에 맞춰 재택으로 밤샘근무를 끝낸 큰애가 안방 문을 빼꼼히 열었다. 이른 새벽이라 깜짝 놀란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밥 줄까?"
"아니요..."
큰애는 잠시 주춤하다가 방문을 닫더니 설상가상 내 옆을 비집고 들어와 아예 자리 잡고 눕는다.
'음.. 이게 뭐지? 꿈인가?'
남편과 나, 그리고 큰애가 한 침대에 누웠던 건 둘째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20년도 넘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당시 두 돌도 안 됐던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4년 차 직장인이 되어 다시 내 품에 안기다니, 아까보다 더 황당해졌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렇게 말없이 10분 정도 누워있다가 아이는 나갔고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날 일은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다.
엄마의 편애에 평생 한 맺힌 나는, 아들 셋을 똑같이 대하기로 진즉부터 마음먹었었다. 예쁘든 밉든 잘났든 못났든 착하든 말든, 모든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
아이들에게도 이 다짐을 시시때때로 말하며 행여 애정결핍이나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자기만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든 완벽할 순 없는 법, 한 번은 큰애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왜 나를 더 예뻐하지 않아요? 내가 공부도 제일 잘하고 말도 제일 잘 듣고 착한데?"
"너한텐 미안한데, 엄마도 어쩔 수 없어. 할머니가 엄마만 홀대하는 게 너무 싫어서 너희들한테는 무조건 똑같이 해주기로 결심했었거든. 너희들이 잘못하면 혼내고 잘하면 칭찬하겠지만 잘한다는 이유로 특별히 더 이뻐하진 않을 거야."
큰애는 어린 시절의 나 만큼이나 억울해했지만 두 번 다시 따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역시 장남이 최고라며 너만 믿는다고 칭찬했다면 큰애는 지금보다 더 훌륭한 청년이 되었을까?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때는 아이도 어렸고 나도 어렸다.
큰애들이 20대를 넘기고 막내가 20대에 가까워지면서 공평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들 각자 원하는 게 다르고 추구하는 게 다른데 무엇을 기준으로 공평함을 정할까. 유학 중이라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 둘째가 큰애보다 더 애틋하다거나, 한 번도 내 품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해서 막내에게 더 소홀하진 않다. 내 마음속에 아이들은 똑같은 지분으로 세팅되어 있다. 다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제 공평함은 물질적인 것에만 치우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돈처럼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만큼 공평함을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대신 정확한 수치를 가늠할 수 없는 애정표현은 각자의 취향에 맞춰주련다.
유독 정에 약한 큰애에게는 차고 넘치게,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둘째에게는 깔끔하게, 무관심이 땡큐인 막내에겐 시크하게 대한다 해서 누구 하나 불만이라면 이렇게 말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