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다는 것

by zena

너무 많은 불행 속에 살아가야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읽었다. 세 명의 인물 중 한 사람은 죽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죽음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다가선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떠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소설에는 죽은 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고 찾게 되는 부분이 그려지는데 그 장면에서 문득 나는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아빠를 버리고 떠난 날. 지금은 그런 날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이 희미해졌지만 어떤 순간을 마주하게 되면 순식간에 그때의 공포와 슬픔이 살아난다. 매일 술을 먹고 집안의 살림살이를 부수던 아빠. 엄마를 괴롭히고 어린 딸들에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 아빠. 내 삶은 아빠를 피해 고작 이불 속으로 숨고 어린 손으로 귀를 막고 아빠가 멈출 때까지 끝없이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처참함이 전부였다. 그렇게 스물을 앞둔 어느 날, 해가 조금 기울기 시작하던 오후였나. 나는 오른쪽 다리에 반깁스를 하고 거실에 아빠와 마주 앉아 있다. 상엔 소주와 잔 그리고 식칼이 놓여 있다.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오라며 소리를 지른다. 언니들도 집에 없다. 언제나처럼 아빠가 술에 취해 잠들 때까지 숨조차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했는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깁스한 다리를 하고 엄마를 찾아오겠다며 목발을 짚고 집을 나선다. 등 뒤로 아빠가 뭐라 소리치지만 듣지 않는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파른 계단을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까, 뛰지도 못하는데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을 오늘은 이긴다. 집을 나서자마자 달리듯이 걷는다. 쫓아올까 봐 최대한 멀리 최대한 위아래 골목을 오가며 복잡하게 걷는다. 멀리 혹은 가까이서 내 이름을 부를까 봐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말이나 하며 소리로 귀를 막는다. 그것이 내가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는 마지막이었고 다시 아빠를 만났을 땐 흔한 영화의 소재처럼 죽음을 앞둔 병원에서였다.


깁스를 한 다리를 끌고 앞으로만 향해 가던 내가 더는 아빠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환희 그 자체였다. 나도 떠날 수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던 내내 흘렸던 나의 눈물은 아빠를 위한 것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슬픔이었다. 내 인생의 어떤 자리는 영원히 부재할 거란 상실감과 비슷했고 그 시절을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분노, 지금에서야 인정할 수 있는 조금의 연민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는데 소설을 읽다 아빠를 떠올린 건 가족 모두가 떠나버리고 남겨진 그때의 아빠는 어땠을까 하는 나조차 갑작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을 모두가 버렸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분노를 느꼈을까 슬픔에 빠졌을까. 사과도 필요 없고 용서할 생각도 없지만 소설 속 인물처럼 죽은 이와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 묻고 싶다. 내가 떠나온 사람이 아닌 내가 버리고 온 그 사람에게 그렇게 남겨져서 많이 아팠냐고, 당신이 남겨져 있던 날들을 내가 이제야 생각해 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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