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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Mar 12. 2021

연극과 커피

커피 한잔할까.     


 내게 저 말은 연극쟁이들의 언어였다. 열아홉 살, 갑자기 연극영화과를 가겠다는 나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먼저 연극영화과를 지망하던 친구를 따라 극단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연극과 영화는 어떤 구분 없이 연기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었고 극단이라는 곳은 그저 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인 줄만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연극과 극단 생활은 내가 TV 속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세상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고, 글들을 창작해야 했으며 (대본) 의상, 소품과 같은 무대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장치들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또, 한번 촬영을 하면 반복이 없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매 순간 눈앞에 관객을 마주하며 실시간으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예술이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고 나는 빠져 들었다.     


 연극에 연자도 모르면서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찾아온 나를 당시에 선생님들은 조금 한심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계절은 몸에서 제법 땀이 나는 여름으로 접어들었고 입시는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선생님들은 스테인리스 컵에 막 끓인 뜨거운 물과 믹스 커피를 섞어 저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왜 연극이 하고 싶냐며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연극의 연자도 몰랐으므로. 마시지도 않은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입안 가득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아 연신 붕어입을 만들며 마른침만 삼켰다.   

  

 그렇게 뭣도 모르고 시작된 연극 작업은 신나는 만큼 힘들었다. 방학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구 연습과 춤 연습, 연기 연습을 하고, 학교를 다닐 때는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가지 않고 입시 특기를 만들기 위한 훈련과 어쩌면 있을지 모르는 연기 재능을 끄집어내기 위한 훈련이 계속되었다. 나는 당연히 매일 녹초가 되었고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반복적인 시간이 한계에 다 다랄 때쯤 누군가 커피 한 잔을 외치면, 그 순간 모두는 해방감을 느꼈고, 나를 포함한 막내들이 믹스 커피를 말기 위해 자리를 뜨고서야 조금은 긴 휴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커피가 곧 휴식이었고 휴식이 커피였으므로, 연습으로 힘들 때마다 나는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그렇게나 떠올렸다.    

 

믹스 커피의 시대가 가고 아메리카노의 시대가 왔다.     


 나는 대학을 갔고 연극의 연자 정도는 알게 되었을 무렵, 고관절이 아프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게 되면서 무대에 서는 것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학교생활과 극단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학교생활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MT도 가고 싶고 늦게까지 동기들과 술도 마시고 싶고, 학교에서 하는 워크숍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극단에서도 MT를 가고 술을 마셨으며, 작품도 소화해야 했다. 단체생활이 중요한 과의 특성상 학교생활을 멀리하는 나를 그 누구도 친구로 받아 들여주지 않았고 자발적, 타의적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믹스 커피가 떠올랐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마치 내 인생이 같았다. 숨 쉴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픈 다리도 쉬게 하고 고달픈 마음도 쉬게 할 공간이 필요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거나 늘 혼자가 돼버리는 학교에 가기 싫을 때면, 근처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엔 믹스 커피의 맛과 닮아 있는 비엔나커피도 시켜보고 카페라테에 휘핑 추가도 해보고, 카푸치노도 시켜봤지만, 학생 신분으로 매일 사 먹기엔 아메리카노가 제격이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가 주는 씁쓸하기만 한 그 맛이 어쩐지 나의 마음의 맛인 것만 같아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연신 입을 쓰으- 쓰으- 거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도 이 커피보단 내 인생이 조금은 달콤할 거라고. 뿌연 희망을 다짐했다.     


그렇게 삶을 연극처럼 살았고, 밥 먹듯이 커피를 마셔댔다.




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choco520/140125139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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