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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Apr 07. 2021

모르는 척해주세요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살아온 나도 어쨌든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았다.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거나 연말이나 명절 같이 특별한 날을 핑계로 서로의 안녕과 건강을 빌어주는 사이가 그래도 열 손가락보다는 넘친다.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보다 때로는 그들이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될 때도 많아 어떤 면에선 더 고마운 관계다. 이 정도라면 딱 좋은데, 그런 사이가 있다. 정말이지 얼굴만 알고 인사만 하는 사이, 같은 공간에 있어서 몇 마디 나누고, 같이 일을 해서 일상을 조금 나누고, 친한 사람의 친한 사이라 호의를 베푸는 관계. 그런 관계는 딱히 사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모르는 사이라고도 할 수 없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다.     


안 보면 그만이지     


 굳이 연락하지 않고 (연락처도 모르고) 만나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지역에 살아서 구체적인 사는 동네를 몰라도 이상하게 한 번쯤은 만날 것 같다 싶으면 꼭 한두 번 만나게 되거나 한 번 만나면 그 뒤로 자주 부딪치기도 한다. 인사를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안 할 때도 있고 할 때도 있는 것을 반복하느라 마음도 찜찜하고 결정 불안이 오기도 한다. 과감하게 무시하기로 하자 싶어 대놓고 안면몰수 했는데, 이상하게 그쪽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하여 나도 모르게 십년지기 친구처럼 있는 거 없는 거 다 그러모아 이야기를 잇는가 하면, 때론 서로가 합의라도 본 것처럼 로봇 얼굴을 하고 지나쳤는데 다시 모임에서 여러 번 봐야 하는 상황이 생겨나 마치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놀람과 반가움, 어색함을 반죽한 얼굴을 하고 연기를 하게 되는 극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내가 이렇게 지루하고 길게 어떤 사이, 어떤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오늘 그런 사이쯤 되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과 그 상황이 무척 난감했고 싫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십 년도 더 전에 알던 그 언니는 일을 할 때 그야말로 곁다리로 알게 된 사이였고 둘이 따로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이 기억상으로 한 번도 없다. 그렇지만 언니의 이름과 나이, 직장과 대충의 주변 관계를 나도 모르게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안다고는 할 수 있었는데, 오늘 딱! 우연히 얼굴을 마주했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더 반갑게, 마치 추억 속에 허우적대듯, 너는 하나도 안 변했다- 그땐 아기(?)였는데 벌써 나이를 그렇게 먹였냐- 아니다, 나는 많이 늙었지- 등등의 안부를 가장한 말 잇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 끝났더라면 참아볼 만도 한데 나는 알았다. 반드시 다음이 있고 그다음에 어떤 질문이 올 것이란 걸. 마치 세상이 정해 놓은 대화의 순서처럼 뭘 해 먹고 사는지, 결혼은 했는지, 누구누구는 만나는지-라고 물을 것이고 정말 질문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예상 질문 중 가장 피했던 질문인 결혼유무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순간이지만 멈칫했다.     


 아-뭐라고 해야 했을까. 어쩌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닌 그녀에게 앞뒤 상황설명과 이해 없이, 이혼했다고 말해야 했을까? 아니면 구구절절 이러고저러고 하여 행복해지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독립했고 그리하여 지금 나는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요 라는 대답으로 빨리 대화를 끝내야 했을까. 그녀도 딱히 내 결혼유무가 궁금한 게 아니었을 텐데… 순간은 너무 길었고, 나는 많은 일들이 있었죠-라고 웃어 보였다. 웃었던 것 같다. 그녀는 아-라고 하며 시선을 돌렸던 것 같다.     


 괜히 과민하고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겐 궁금한 게 없을 땐 그냥 좋아 보이네-라고, 잘 지내라- 하고 지나가면 좋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해주면 좋겠다. 그렇다고 당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그래도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 속에서 잠시 꺼내어 보았을 텐데.       


 나는 아직도 힘들었던 순간을, 견뎌낸 그 순간들을, 앞도 뒤도 없이 하나의 문장으로 흩어지는 소리로 뱉어낸다는 게 쉽지가 않다. 당신도 알 것이다. 우린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란 걸. 그러니 우리 아름답게 모르는 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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