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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Nov 13. 2021

다른 세계에서

뭉게구름 떼가 막 눈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나? 책상 위에서 드릴 소리가 났다. 나의 집에선 드릴을 쓸만한 일이 없고 그러므로 당연히 드릴도 없기에 바라본 책상 위엔 휴대폰이 온 힘을 다해 좌우로 떨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가까운 시간 Y가 다급하게 나를 찾고 있다. 한 번씩 전화해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마치 내가 반드시 알아야 어떤 것처럼 떠들어 대던 그였지만 나른하고 지루한 오후 어느 쯤이 아니면 감감무소식이라고 할 정도로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이상해

-응, 네가 더 이상해

-항상 거기서 끝난다구

-Y야, 지금 몇 시인지는 아니?     


역시나 내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해댄다. 별일 없어 보여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슨 짓인가 싶어 골이 났는데 사뭇 진지함이 묻어나는 그의 말투에 일단은 잠자코 듣기로 한다.     

-집이 온통 나무로 된 가구들로 가득 차 있어. 책상이랑 의자 침대와 옷장까지. 가전제품을 두는 곳도 다 나무로 된 선반이나 틀로 짜여 있어서 어쩌면 숲에 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짙어. 군데군데 몬스테라와 극락조, 올리브나무 같은 식물들이 줄지어 있어서 눈을 뜨면 여기가 숲속이구나- 싶을 정도랄까. 아침 일찍 침대에서 눈을 떠 어기적어기적 거실로 나가면 통으로 된 베란다로 햇살이 아주 옅지만 찬란하게 들어차. 그 빛들이 온기가 되어 몸에 닿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 그렇게 잠시 하염없이 밖을 보고 있어.

-누가? 내가? 아니면 네가? 야...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해. 역시 원목으로 된 긴 의자에 깊고 짙게 앉아서. 신선한 원두가 뜨거운 물줄기를 따라 검은빛, 방울 방울로 떨어지는 게 느껴지는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마치 내가 어둠 속에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또르르 똑똑똑 떨어지는 기분이야.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서 단조롭지만 반듯한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짐 같은 건 하나도 들지 않고 가볍게 밖으로 나가지.

-Y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아니, 무슨 상황인 거야?

-근데 거기서 끝나버려. 차를 타고 바다로 가든지 아니면 옷을 갈아입고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더 이어지지 않고 끝나버려. 어제는 잠이 들어 버렸고 그 전날엔 생각이 아예 끊어져 버렸어. 그 이상 어떤 이야기도 펼쳐지지 않아...이상해.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부터 잠들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잠이 들기 위해 양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를 세어보았으나 잠은커녕 양들이 몇 마리인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양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전국 맛집을 순회하는 블로거가 되었다. 윗지방부터 아랫지방까지 그가 알고 있던 맛집 목록들을 한 바퀴 돌고서도 또 가야 할 곳이 필요 하자 다음으론 먹고 싶은 음식별로 없는 곳도 만들어내 가기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우동 맛집부터 좋아하지만 자주 가지 못하는 참치 집까지. 빠짐없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돌고 나자 그는 급격한 허무함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허무함을 순식간에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Y는 갑자기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힘을 낼 수 있다는 거기서 거기인 말을 뱉으면서. 요리에 ‘요’ 자도 모르는 그가 먹은 거라곤 주구장창 라면뿐이었다. 그것도 열라면 아주 맵게.     


못해도 5kg는 불어났다며 깡마른 Y가 재잘거리던 게 몇 달 전이었다. 아마 열라면이 너무 매워서 문제인 거 같다며 크림 까르보 불닭볶음면으로 먹어 봐야겠다고 전화를 끊어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가 오늘 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누구의 집인지는 모르나 나무로 가득 찬 숲속 같은 집을 달랑 커피 한 잔 마셔버리고 빠져나오는데, 그 뒤론 할 일이 없는지 할 줄 아는 게 없는지 더 이상의 상상력이 동원이 안 되어 꿈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게 그의 문제라면 문제인 건데, 아니 도대체 나는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나 싶고, 딱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내가 이상하다 느낀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쏟아 낼 말들을 다 쏟아내서였는지 그도 나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귓가에 그의 말이 눈앞에 맴도는 듯해 나는 뒷이야기를 상상했다.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마신 후 아마 그 사람은 하얀 운동화를 신고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마치 세상이란 풍경을 처음 본 것처럼, 모든 게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고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듯 담으며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가 닿은 곳은 아마-     


-왜 꿈꿀 수 없게 되었을까. 꿈을 그릴 때조차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뱉으며 나를 부정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입이 더 단단하게 닫혀지는 게 느껴졌다. 완전한 침묵이랄까.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이 이상하게 아프게만 느껴진다. Y가 매일 밤 들어서고자 했던 곳이 잠의 세계였는지 현실의 세계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다른 세계였는지 농담이라도 어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줄 수 없어 나는 슬펐던 것 같다. 차라리 잠을 자라고 위로도 안 되는 소릴 뱉으려다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Y야...요즘 <오징어 게임> 재밌다던데, 우리 오랜만에 오짬(오징어짬뽕 라면) 먹으면서 그거나 볼까? 괜찮다면 지금 와도 좋아.

-...넌 언제나 옳은 소리만 하는구나.   

   

유달리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고 넓게 펼쳐진다. 한없이 보고 있자면 끊임없이 다른 세계가 열린다. 내가 이렇게 펼친 이야기가 진짜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을까도 싶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라면은 육개장 사발면이고 큰사발면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나는 라면을 안 먹은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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