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산이, 제3의 산이는 어디에나 있다.
‘이수역 폭행 사건’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던 지난 11월 15일, 래퍼 산이(San E)가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리 불공평하게 자라지도 않았는데 권리는 외치면서 군대는 안 가고 데이트할 때 돈은 남자가 더 내게 하는 존재,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도 합의 아래 관계를 갖고 할 거 다 하면서 ‘미투’를 외치는 존재. 자기만족을 위해 성형수술을 받아놓고도 브래지어 차지 않고, 머리를 짧게 자른 것으로 진보적 여성이라고 믿는 존재.
그와 동시에 자신은 믿을만한 페미니스트, 괜찮은 페미니스트라며 서열을 나누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지만, 혐오가 불씨가 되어 혐오가 조장되는 상황을 혐오한다’는 설명을 달았다. 이슈에 편승해 철저히 한 입장만을 표방한 가사로 오히려 성별 갈등을 부추김에도 ‘난 괜찮으니 날 믿어’라 외치는 가사는 퍽 괴상한 모순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래퍼 제리케이(Jerry.K)가 ‘No You Are Not’으로 본인을 비판하자 산이는 ‘6.9’라는 제목의 맞대응 곡까지 발표했다. ‘남자 페미니스트라 하지만 속 마음은 여자 존중치 않는 파렴치’라는 근거 없는 비판은 물론 ‘페미 코인’과 ‘좌좀’이라는 저열한 단어 선택은 그의 한심한 의식 수준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버렸다.
한동안 추이를 살피면서, 어쩌면 한국 사회 다수가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에 공개한 신곡 ‘페미니스트’는 공개 하루 만에 조회수 20만을 기록하며 화제의 중심이 됐다.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 댓글창은 산이의 가사를 ‘사회 이슈에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래퍼’라 칭송하며 단결했다.
‘디스 이즈 아메리카’를 조악하게 오마주한 것은 물론 양비론적 태도로 우위에 서고자 했던 괴작 ‘Wannabe Rapper’, 한 때 ‘랩 지니어스’였지만 발라드 힙합으로 인기를 얻었음에도 ‘리얼 힙합’을 강조하던 갈팡질팡 래퍼 이미지는 사라지고, 온라인 한정 산이는 영웅이 됐다. 제리케이와 슬릭에게 랩 실력과 과거 언행 등 전에 없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건 덤이다.
그런데 돌연 산이는 19일 SNS에 ‘페미니스트’에 대한 해명문을 공개했다. 곡 속의 화자는 산이 자신이 아니며,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적 장치라는 설명이다. 산이의 설명대로라면 ‘6.9’에서 ‘제리케이 넌 좀 맞아야겠다’라 말하는 이는 본인이 아닐뿐더러, 앞서 소개했던 일반화 역시 자신의 의견이 아닌 가상 화자의 의견이라는 뜻이 된다. 이 고독하고도 우스운 자아 갈등 고백은 모두의 비웃음을 샀다. ‘우리 편’이라며 칭송하던 온라인 커뮤니티의 황당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산이의 해명문은 그가 사회 이슈와 갈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래퍼가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시킨다. 그에게 갈등과 사회 문제는 본인의 유명세와 ‘리얼 힙합’ 이미지를 위한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2016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래퍼들의 사회 참여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대두하자 황급히 ‘나쁜 X’을 공개했고,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가 문화계 충격을 안기자 이를 흉내 낸 ‘Wannabe rapper’를 내놨다.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로, 이수역 폭행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 노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무지는 비단 ‘페미니스트’의 일차원적 가사 이전에도 문제가 됐다. 국정농단의 주역들과 대통령을 비판한 ‘나쁜 X’은 주제와 상관없는 여성 비하 표현으로 몸살을 앓았다. 오마주만 남고 메시지는 실종된 ‘Wannabe rapper’는 덤이다. ‘부모 탓 환경 탓 대통령 탓 사회 비판해’라며 비판을 쓸데없는 일, 의미 없는 행위로 규정했다.
산이는 본인이 페미니스트라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사회 문제에 편승하여 이익을 챙기는 데 있다. 그가 진정 혐오를 배제하고 남녀 갈등에 관심이 있다면, 19일 새벽부터 ‘여친 몰카 인증’ 릴레이를 벌이는 일베 사이트가 압수 수색당하는 현실은 왜 랩으로 풀어놓지 않는지 궁금하다.
제리케이는 콜센터 직원, 일용직 노동자, 여성 등 다양한 소외받는 계층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랩으로 풀어낸 래퍼다. ‘페미니스트’를 비판한 ‘No You Are Not’ 역시 과거 자신이 발표한 ‘You are not a lady’의 편견적 가사를 반성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역시 산이를 디스한 슬릭 역시 남성 주류의 힙합 씬에서 혐오 단어 사용 금지를 외치며 페미니즘 이슈에 목소리를 내왔다.
반면 산이는 페미니즘은커녕 남녀 갈등 상황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논란이 많았다. 유명 래퍼 에미넴의 < The Marshall Matters LP >를 따라한 2013년의 < ‘Not’ Based On True Story >는 헤어진 연인에게 악담을 퍼붓고 자살하는 우스꽝스러움만 있었다. 2014년에는 피처링 가사에 ‘소라넷 스타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은 물론, ‘나쁜 X’ 역시 여성 비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7년 ‘여혐, 남혐, 일베, 메갈, 여당, 야당, 너, 나 / 모두 다 시끄럽다’라는 ‘I am me’는 스스로가 그런 사회 이슈를 말하기에 자격 미달임을 토로하는 꼴이다.
‘페미니스트’ 가사가 논란이 되자 뒤늦게 산이는 발표한 해명 글을 통해 가사 한 줄 한 줄을 수능 지문처럼 해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잠잠한가 싶더니 유튜브 계정에 ‘페미니스트와 6.9 댓글 리액션’이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낄낄거리면서 진지함은 단 하나도 없음을 셀프 인증했다. 곡 발표 전 가사에 대해 고민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산이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본인만 알고 있을 ‘제3의 자아’ 작품으로 결론지어지며 세간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당장 ‘주차장, 지하철 자리, 버스 배려석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존재로 폄하당한 여성들의 분노는 물론, ‘팩트 폭력’을 가한다고 신나 있던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황당한 흑역사에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산이가 ‘악의 평범성’을 증명했다면 어느 정도 성공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등장하면 경기를 일으키고 마치 사회 악인 것 마냥 호도하는 인터넷 사이트 유저들은 무지와 양비론, 혐오를 자랑하면서 억압받는 현실의 틀을 더욱 가혹하게 죄어간다. 산이는 온라인 생태계를 게토(Ghetto)라 여기며 스스로를 억압받는 존재로 여기고, 배려와 인권을 비웃는 이들을 대표했을 뿐이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산이와 달리 이들은 용감하지 못하다. 제2의 산이, 제3의 산이는 우리 옆에 있고, 어디에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