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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Jun 14. 2019

사라지는 것들, 모래내판타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4집, 우린 사라지지 않으리.


서대문구 수색로 2길, 모래내시장의 깊은 곳에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이하 구남)가 있다. 한때 이 곳은 '연신내 술집에선 연신 술값 내라 하고, 모래내시장에선 모레 내도 된다 하고...'라는 만담이 있을 정도로, 가난해도 정겨웠던 서민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디지털 미디어 시티, 연희, 연남, 홍대의 불빛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과거의 공간, 우후죽순 솟아나는 아파트 단지에 밀려 철거 진행 중인 소외된 장소... 그 모래내의 허름한 건물에서 쿰쿰하고 메마른, 빛바랜 바이브의 환상곡이 피어오른다.

< 모래내판타지 >는 음지의 기록이다. < 우정모텔 > 이상으로 강력하게 제습된 소리는 간결한 베이스와 드럼 리듬의 앙상한 뼈대, 까칠한 기타 리프와 주술적인 코러스의 날 것으로 건조하다.


쨍한 햇빛처럼 밝았던 < 썬파워 >의 밴드 사운드는 멤버 부침과 긴 공백기를 거쳐, 고층 건물의 그림자에 햇빛을 빼앗긴 인근 주택처럼 어두워졌다. 데뷔 멤버 임병학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조웅이 '망한 나라에서 산다'('망한나라')라 노래하는 곳에 다다르면, 우리는 이것이 '음지의 기록' 일뿐 아니라 '패배의 기록' 임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한 때 조웅은 새로운 소리를 담기 위해 '물불토킹'이라는 새 팀 이름을 고민했다. 그 낭만의 흔적은 천진하면서도 힘 잃은 김나언의 코러스와 울적한 레게 리듬의 '물불'로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1집의 '언더스탠드 케어레슬리'의 물기찬 사랑을 '나띵 컴페어 투유'로 옮겨 가는 과정도 흡사하다. '비가 오는 아침 / 너와 내가 둘이서'의 노래가 차가운 여백 위 얹히는 광경은 애틋함보단 고독과 가깝다. 언제 끝날지 알 길 없는 리프의 반복 위 더해지는 김오키의 색소폰은 쓸쓸함의 여운을 더욱더 짙게 남긴다.

밴드가 2007년의 '오~ 싱가포르'를 다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기 발랄한 드럼 머신과 몽환적인 기타 연주 위 '내 방에 들어와 / 작은 방이지만 /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라 노래하던 젊은 조웅은 나른하게 일탈을 부추기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오 싱가포르'는 낭만의 물결 표시도 떼어졌고, 베이스 리듬은 건조하며 '편히 쉬어'의 제안은 '편히 쉬어라'의 간접 명령으로 변했다. 모래내시장이 낡아간 만큼 밴드도 세월의 무게를 지었음을, 그리하여 팀 이름처럼 오래전 스텔라 자동차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덤덤히 인정한다.


과거 구남은 현실에 머무르며 탈출을 꿈꾸는 도시의 히피였다. '도시에서만 살기는 젊음이 아깝잖아 / 옛 애인이 살던 바다로 가볼까'('도시생활')의 재기발랄한 젊음은 < 우정모텔 >에서 야릇하게 '남쪽으로 간다'를 불렀고, 4인조로 사운드스케이프를 확장한 < 썬파워 >의 모토는 '우주로 가자'였다.


그러나 모래내 시장 깊은 곳의 이번 앨범은 정착과 관조의 기록이다. '우리는 끝없이 흐른다'처럼 하염없이 흐르는 삶 속에, 추억은 '지워진 자국'과 '여름밤'처럼 희미한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모래내의 아티스트는 분노와도 손을 잡는다. 라디오헤드의 'Paranoid android'가 스쳐 가는 '재개발'이 그것이다. 높아 가는 아파트, 문명의 불빛 속 소외된 구도심에 머물러야 하는 '망한 것들'의 경고가 느릿한 몽환과 변주 아래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이 화는 라디오헤드처럼 과격한 분노로 이어지지 못하고 '건드리지 마 이 바보야'의 무기력에 그치고 만다. 음지가 양지를 전복할 수 없듯 망해가는 것, 허물어지는 것을 다시 세울 수 없는 법이다.



이렇듯 < 모래내판타지 >의 구남은 불분명하고 나른하며, 몇 꺼풀 속 은근히 담아 둔 패배의 무드로 어둡다. 앨범은 희미해지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회고이자, 데뷔 13년 차를 맞은 베테랑 인디 뮤지션이 모래내시장이라는 공간에 삶을 투영한 기록이다. 그러나 밴드는 마냥 좌절하고 슬퍼하며 우울해하지 않는다. 월드 뮤직의 잔향 짙은 기타 연주와 간결한 멜로디, 적절한 변주의 노련한 손길이 이 모두를 따스하게 보듬는다.

사라지는 것은 막을 수 없고, 시간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막연히 뒤돌아보고 그리워하는 대신, 우리가 한때 그곳에 존재했음을 담아 두자. 중년의 히피 뮤지션이 과거를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끝이란 말 두렵지만
우린 사라지지 않으리
'무지개'


모래내시장의 흥얼거림은 그렇게 우리의 지난 시간과 장소를 담은, 애틋한 판타지로 노래 불려진다.




[profile:]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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