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4년.
'XXX 후보 51퍼센트, XXX 후보 49퍼센트!'
서울로 향하는 어둑어둑한 밤 버스로부터 나의 XXX 정부가 시작됐다. 단 1퍼센트 차이니 뒤집어질 거라 생각했었다. 수능 끝난 기념으로 소주 한 잔 하자던 고등학교 선배와의 자리, 즐거웠던 분위기는 갈수록 우울해져만 갔다. 그때쯤 돼서 뭔가를 느꼈던 것 같다. 대학 가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선생님들의 말씀도 틀린 걸 수도 있다는, 스무 살이 되더라도 싶지 않겠다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
역시나 스무 살 인생은 술술 풀리지 않았다. 반수 결심은 육체와 정신 피로 아래 나른해졌고 음악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떤 게 나의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지독한 무기력증이 있었다. 이건 어디서 온 거지? 알 틈 새도 없이 어느새 나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3년 후 유행어가 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마인드를 가져버렸다.
사춘기 감성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블로그에 어느 날 20대 저항 정신은 다 죽었다고 경솔한 선언을 했다. 재수를 선택해놓고 음악 듣고 글 쓰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우습게도 그 글에 나온 무기력한 현실 안주자 청춘이 되어가는 나를 지켜봐야만 했다. 창조 경제라는 허황이 기가 막히고, 해외 순방만 나가는 지도자였지만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나 있냐며 질책을 받곤 했다. 난 그때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대학은 좋은 데 가고 싶고, 음악도 엄청 많이 알고 싶었다. 방 안에서 공부하거나 노래 듣는 게 최선이었다.
결국 두 마리 토끼는 못 잡았고 매일 하던 글쓰기는 새로운 일이 되었다. 그때도 딱히 뭔가를 해야겠다 어떻게 되어야겠다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루하루 시키는 것들하고 공부도 하고 좀 안정적인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가만히 있어야지. 4월 16일 아침에도 다 구조됐다니 조금만 더 자고 학교 가야지. 이런 끔찍한 생각을 했었다.
세상은 점점 무기력해졌다. 수상한 시절에 안녕들 하시냐는 외침에 참가했을 땐 서대문역 집 가는 할머니조차 방패로 막아서는 의경들을 보았다. 가방에 리본을 달았더니 저 사람들만 죽었고 소중하냐는 핀잔을 들었다. 서울의 가장 큰 병원에서 질병 하나를 못 막아서 전국이 공포에 떨 때도, 수많은 아르바이트 친구들이 무릎을 꿇을 때도, 강남역 한복판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칼에 찔려 죽을 때도, 항상 당한 쪽이 억울했다. 목소리 내는 친구들은 인기도 없고 재미없는 과격파들이라 여기던 때였다. 중도다, 다르게도 생각해 보라며 판단을 유보하던 사람들은 재밌게 그들의 삶을 살았다. 그 자아를 제대로 잡아놓지 못한 채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갔고, 영장이 날아왔다.
분노는 한 층 냉철해졌고 논리에는 점점 힘이 붙었다. 어디 가서도 말 못 하는 신세라는 게 문제지만. 수많은 글을 쓰며 노트 위에 아무 말이나 적어가며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천천히, 다시금 쌓아 올리고 있었다. 세상도 전과 같지 않았다. 모두가 그대로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는 점점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나른함, 무기력의 늪은 더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차라리 개그라고, 짜고 치는 얘기라고 해야 믿을 법한 이야기들이 현실 속에서 망령처럼 배회했다. 결국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다. 정부는 탄핵당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 테다.
다시 고3 때로. 한창 공부하기 싫었던 바로 그때 XXX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정신도 아니라는 격앙된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본 친구들은 조만간 국정원에서 널 잡아갈 거다, 조심해라고들 말을 해줬다.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분위기가 그랬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정말 세상이 끝장나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앗아가 버렸다. 빙 돌아서 왔다. 강제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피곤한 일이었다.
그날 밤은 너무도 외로웠다. 거의 처음 마셔보는 술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욕밖에 나오지 않던, 페이스북에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절규하는 아우성이 차고 넘치던, 우울하게 침대에 누워버렸던 그날 밤. 그 후로부터 우리는 4년 동안 외로운 낮과 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젠 덜 외로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