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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Apr 07. 2020

그라임스 'Miss Anthropocene'

비범하게 다가와 보편으로 돋보인다.


그라임스는 자본의 논리와 성차별이 만연하던 기성 음악계에 학을 떼고 모든 것을 홀로 해냈다. < Visions >와 < Art Angels >에서 그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독자(獨自)로 존재했다. 그러나 5년 만의 새 앨범 < Miss Antropocene >의 그라임스는 자신을 낮춘다. '인류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거대한 프레임 아래 환경 보호, 인공지능, 우주 진출의 메시지를 수놓고, 기계 문명과 현대 사회의 혼돈에서 깨어난 신들을 모시는 만신전(萬神殿)을 지어 그곳의 사제를 자청한다. 주술적이고 종교적이며 어둡다.


그가 종속되고자 하는 까닭은 최근 그의 삶이 타인에 의해 짙게 영향받은 탓이다. 우주기업 스페이스 X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와의 교제는 그라임스에게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을 주입했다. 거친 인더스트리얼 메탈 트랙 'We appreciate power'를 2018년 선공개하며 '공격적 행동, 경주자의 활보, 목숨을 건 도약'을 찬양할 때까지만 해도 앨범은 과격한 선동가가 될 것이라 예고되었다. 


그러나 절친한 동료였던 래퍼 릴 핍(Lil Peep), 매니저 로렌 발렌시아(Lauren Valencia)의 사망 소식은 그라임스의 시선을 사물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았다. 도시 속의 엔야(Enya)를 연상케 하는 'So heavy I felt through the earth'의 몽환과 함께 '인간 시대'의 병폐와 우울이 앨범의 핵심으로 자리했다.



발랄하고 다채로웠던 과거 작품과 비교해 앨범은 정적이고 우울하며 혼돈을 머금고 있다. 전작의 'Scream'으로 합을 맞춘 바 있던 대만 래퍼 아리스토파네스(潘PAN)와의 'Darkseid'에는 불안과 공포의 메시지가 처연히 깔려있다. 'California'의 컨트리 기타를 이어온 'Delete forever'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고독하다. 성형 수술과 소셜 미디어를 'New gods'로 섬기는 현대 사회를 느릿한 피아노 발라드로 노래하고, 직접적으로 죽음을 노래하는 'Before the fever' 역시 음울하다.


이상의 곡들은 아티스트 개인의 심경을 담아내는 역할에는 충실하나 과거의 총기(聰氣)는 상당수 잃었다. 그럼에도 어둠 속에 번득이는 재치를 숨겨둔 트랙이 더 많다. 환경오염에 고통받는 지구의 시선에서 그 가해자인 인류에 갖는 애증의 감정을 'Violence'로 풀어내는 상상력, 발리우드 스타일의 처연한 멜로디를 전개하다 급격히 속도를 올려 질주하는 '4ÆM'의 창의력이 건재하다. 틸 튜스데이('Til Tuesday)를 연상케 하는 'You'll miss me when I'm not around'나 'My name is dark'로 대중적 멜로디 감각 역시 출중함을 재차 증명한다.


< Miss Anthropocene >은 미래파의 사상처럼 예술과 속도만을 쫓던 그라임스가 자신의 커리어와 인간관계, 삶의 궤적을 정리한 이정표 같은 작품이다. 거대한 개념과 주제 의식에 비해 그 결과물은 평범하고, 일론 머스크와 로렌 발렌시아의 흔적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공존한다. 그러나 이 평범함은 그라임스의 인간적 면모를 의도한다. 사이버 펑크, 아트 엔젤로 불리며 범접할 수 없어 보였던 천재 역시 우리 곁에서 숨을 쉬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동료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기도 하는 한 명의 사람임을 각인하고 있다. 비범하게 다가와 보편으로 돋보인다.


Grimes - Delete Forever (Official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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