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곡 순서 무관
애비뉴 비트(Avenue Beat)는 고등학교 동네 친구들이었던 사미 비어든, 사바나 산토스, 샘 백오프가 뭉쳐 결성한 그룹입니다. 컨트리 음악을 하겠노라 내슈빌에 보금자리를 만든 그들은 지난해 동명의 데뷔 EP <Avenue Beat>를 내며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만 컨트리 신에서의 작은 관심을 받는 데 그쳤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바이럴 히트의 성지, 라이징 스타들의 검증 공간 틱톡(Tiktok)이 있었습니다.
올 초 간결한 팝 트랙 'I don't really like your boyfriend'가 스포티파이 바이럴 차트에서 상승세를 보이자 이들은 한 달 만에 틱톡에 신곡을 공개해버립니다. 멤버 세 명이 무기력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중지를 치켜들고 '2020년 X까'를 노래하며, 배경에는 코비 브라이언트와 도널드 트럼프, 호주 산불 같은 비극과 코로나 이전 한가한 일상의 모습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Lowkey F 2020'라며 소심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덤.
누군가의 말처럼 '우울하고 앙증맞은' 이 싱글은 틱톡에서 1,1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바이럴 히트를 기록했고, 패리스 힐튼, 윌 스미스, 마렌 모리스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호응 속에 1절만 있던 노래는 2절을 붙여 7월 정식 발매, 제시 레예즈(Jessie Reyez)가 목소리를 보탠 리믹스 버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영미권에서 불티나게 호응을 얻고 있는 'Fuck 2020' 기조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죠. 바이럴, 틱톡, 스포티파이, 현재 음악 비즈니스를 관통하는 세 가지 핵심을 상징한 노래입니다.
이 3인조를 슬프게 하는 것은 '글로벌 팬데믹'의 대재앙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누구도 듣지 않을 노래를 만들고, 키우던 고양이가 죽고,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았던 한 해가 통째로 망해버렸다는 일상의 박탈감이 더욱 큽니다. 그 괴로움이 강력한 분노 대신 소소한 푸념으로 이어지는 것 역시 우리의 오늘날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Lowkey F2020.
네가 옷을 벗으면 더 좋을 것 같아
티어스 포 피어스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가 떠오르는 1975의 대곡은 온라인 캠걸(Cam Girl)과의 하룻밤을 다룹니다.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이성을 찾아 매일 밤 스크린 속 완벽한 이상형과 대화를 나누고,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제안에 얼굴을 붉힙니다. 코로나 19 대재앙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현실성이 우리를 무너트렸다(Modernity Failed Us)'라 노래하던 밴드가 21세기의 토킹 헤즈를 꿈꾸며 만든 냉소의 곡. '모든 신기술은 포르노그라피와 성적 분야에 제일 먼저 적용된다'는 씁쓸한 격언, 한 해를 분노케 한 디지털 성범죄... 많은 것들이 떠오른 2020년의 노래였습니다.
혼자는 아니지만 언제나 외로워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는 Z세대의 공허. 디지털 세대의 외로움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격리 상황에서 더욱 애잔해집니다. 놀랍게도 이 노래 역시 코로나 19 범유행이 본격화되기 전 발매된 곡입니다. 어쩌면 이 대재앙이 우리가 애써 무시하려 하던 모순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려는 초자연적 운명을 현실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연초부터 지금까지 꼭 생각이 나는 곡입니다.
메간 더 스탤리언이 'Savage'로 대권에 도전하자 카디 비는 그를 불러 '유교 걸도 기절할' 'WAP'를 내놓았습니다. 지나치게 유희로 받아들여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결국 이 곡에서 두드러지는 중요한 점은 자신감과 솔직한 욕구의 투영, 백인 주류 사회의 희롱과 편견 어린 시선을 뒤집는 전복의 시선입니다.
당신이 한 짓을 나에게 하지 마오, 미국이여
스푸얀 스티븐스는 5년 전 <Carrie & Lowell> 작곡 과정에서 미국 사회에 대한 의문을 틈틈이 곡으로 써내려 왔습니다. 한때는 사랑했고, 경외했으며, 위로받고 또 숭배했던 거대한 국가의 이상 아래의 모순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판의 시각은 2020년 광기와 혼돈의 땅으로 변한 미국의 오늘날을 예언했습니다.
<The Ascension>의 장엄한 마지막 트랙 'America'는 12분에 달합니다. 웅웅 거리는 보컬과 겹겹이 쌓인 코러스의 잔향 속에서 부유하며 혼란을 대변하더니, <The Age of Adz>의 전자음과 노이즈가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지미 헨드릭스의 불타는 'The Star Spanggled-Banner' 연주를 연상케 합니다. 차분한 피아노 연주의 마무리 속에도 섬뜩한 부분이 튀어나오고요.
악몽과 같은 한 해 뒤에는 수많은 구조적 모순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America'는 단꿈에 취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인트로 속 장엄한 보코더 연주와 너무도 건조한 드럼 비트가 과거로의 문을 활짝 엽니다. 산더미같이 밀려들어온 시간의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테임 임팔라의 음악에는 예스, 오케스트럴 매뉴버스 인 다크,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등 프로그레시브부터 1980년대 뉴웨이브, 신스 팝이 기억의 지층을 형성합니다. 레트로라는 단어에 갇힌 과거 영웅들의 망령이 애처롭게 'One More Year'를 외치는 가운데 올해도 성공적인 시간 여행으로 독창성의 지위를 확보한 이들입니다.
프로듀서 태즈 테일러의 인터넷 머니 레코즈의 컴필레이션 앨범 <B4 The Storm>은 오늘날 힙합의 경향을 투명하게 들려줬습니다. 마치 파사이드의 1992년 데뷔작 <Bizarre Ride II the Pharcyde>를 연상케 하는 놀이공원 커버가 인상적이었죠. 컴필레이션인 만큼 앨범 단위 결과물은 들쑥날쑥한다는 느낌이었지만,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노래만큼은 오래도록 들었습니다. 나브와 거너의 멋진 퍼포먼스에 이어 곡을 지배하는 것은 돈 톨리버입니다. 애잔한 일렉트릭 기타 아래 화려한 트랩 비트를 깔고 펼치는 화려한 싱잉랩은 거의 가창이라 봐도 될 정도. 캐치한 멜로디 아래 치밀한 디테일들을 숨겨뒀습니다. 올 한 해 멋진 활약을 보여준 돈 톨리버였습니다.
<Future Nostalgia>에서 한 곡만 꼽으라면 이 노래입니다. 'Don't Start Now', 'Break My Heart', 'Physical' 모두 멋지지만, '되살아난 유로 댄스'같은 느낌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개념으로 많이 소비되는 것 같았거든요. 간결하고 깔끔한 펑키(Funky) 사운드로 호흡한 'Levitating'이 2020년의 제겐 기억에 남는 곡입니다.
내년 그래미 시상식의 최다 노미네이트 가수는 비욘세입니다. 올해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을 격려하기 위해 'Black Parade' 싱글을 기습 공개한 것에 대한 공을 인정받았죠. 제가 의문인 점은 비욘세의 치적은 인정하면서 왜 앤더슨 팩의 'Lockdown'은 제외했냐는 것입니다.
앤더슨 팩이 바라본 BLM 투쟁의 현장은 전쟁입니다. 이 곡은 아직도 BLM을 흑인 폭동으로 치부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투쟁가이며, 주류 사회가 억압한 소수들에게 어떤 형태의 폭력을 일상에서 휘두르는지 보여주는 효과적인 교보재입니다. 뮤직비디오까지 완벽합니다. 총탄이 빗발치고 불타는 도시에서 목소리를 높인 후 돌아온 가장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비욘세는 올해 블랙 커뮤니티에서도 지나치게 아프리카를 신성화하고 또 스테레오타입에 가뒀다는 비판을 받았죠. 자부심은 주입한다고 해서 길러지지 않습니다. 'Black Parade'가 식자층을 위한 우아한 투쟁이었다면 앤더슨 팩의 '락다운'은 경찰에게 무릎으로 목이 눌려 숨이 끊어지는 절박한 이들의 절규와 고통의 신음이었습니다. 대중음악은 대중과 호흡하기에 가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트래비스 스캇은 올해도 종횡무진 활약했습니다. 그중 지난해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JACKBOYS>의 첫 트랙 'Highest In The Room' 리믹스를 꼽아보고자 합니다. 라틴을 넘어 팝 세계가 주목하는 신성 로살리아가 참여하며 원래도 멋졌던 곡이 더욱 세련되고 고혹적으로 변했습니다. 올해의 신인 중 하나인 릴 베이비도 실력을 뽐냈고요.
2010년대 말 세계를 강타한 '편집샵 음악'의 선두주자 무라 마사가 기타를 잡았습니다. 그가 목격한 최근 영국의 젊음은 브렉시트, 이민자들과의 갈등, 대물림 되는 가난과 차별의 언사에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아이들스(IDLES) 같은 초강성 하드코어 펑크 록 밴드들과 묵직한 그라임(Grime)이 주요한 흐름을 만들고 있죠.
섹시한 제목의 <Nothing Great About Britain>으로 데뷔한 래퍼 슬로타이와 합을 맞춘 'Deal Wiv It'은 그 자체로 기억에 오래 남지만 향후 2~3년 내 이런 기타 위주의 펑크 록이 일종의 '힙' 유행으로 자리 잡을 것임을 예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렉트로닉 DJ들, 래퍼들, 힙합 프로듀서들에 의해 록이 다시금 생명을 얻고 있죠. 반항의 지침서 혹은 MZ세대 저항의 문법에 일조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던 곡.
가장 픽시스스럽고 언뜻 R.E.M 다웠던, 스매싱 펌킨스의 잔향에 크랜베리스와 비요크, 1990년대 후반 얼트 록에 투신했던 여성 로커들 한 스푼 얹은 듯한 사커 마미. 곡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 올해 이런 류로 등장했던 수많은 얼트 밴드들, 혹은 로커들의 곡 중에서 가장 투명하게 지향점을 선언한 노래라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속에 숨어있는 노스탤지어와 멜랑꼴리로 Z세대의 불만점을 들려준 것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그 역시 이미 30년 전 다 들은 것이긴 해도...
레이디 가가의 하이-엔알지(HI-NRG)는 그가 생존하는 방법은 오직 열정과 춤, 무대라는 사실을 다시금 각인합니다. 켄트의 'Ingenting'이 계속 귓가를 맴돌지만 'Stupid Love'의 컨셉추얼함 대신 진정성으로 승부한 'Rain On Me'의 울림은 꽤 깊었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전 세계 댄스 플로어를 휩쓸었을 트랙인데 그것이 21세기 초, 밀레니엄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공존했던 어수선한 시기의 음악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네요.
누군가는 'Take On Me'와 'Blinding Lights'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레트로의 물결만 있었다면 수많은 가작과 카피, 오마주로만 머물렀겠죠. 근래 아티스트의 상황과 자아를 이토록 장엄하고도 세련된 결과물로 일치시킨 팝 앨범은 드물었습니다. <After Hours>에는 <Trilogy>의 황홀한 감각과 'Can't Feel My Face'의 놀라운 대중적 감각이 함께 살아 숨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장르는 리나 사와야마'라는 페이퍼 매거진의 특집 기사가 기억납니다. 리나 사와야마는 올해 그가 쌓아온 이미지 - 팬 섹슈얼, 서구 사회에서의 아시아인, 와패니즈들의 페티시, 세기말 맥스 마틴 바이브, 케이팝 - 를 <SAWAYAMA>로 한껏 뽐냈죠. 서구 사회에 가장 익숙한 팝의 문법으로 과격하고 낯선 것들을 노래하는 그의 도발은 아주 신선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3년 전 <RINA> 만큼의 즐거운 유희보다는 멜로디 감각이 살짝 죽고 퍼포먼스 쪽에 더 힘을 실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물질 숭배와 고정관념을 한껏 비튼 'XS'는 왜 그가 '하이퍼 팝'이라는 신식의 찬양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유의미한 존재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