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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y 13. 2017

세일즈맨

일상의 균열 속에서


미지의 외계 생명체가 우주선에서 벌이는 학살극, 행성 단위의 화끈한 전투, 촌동네에서의 범죄 추적극보다 섬뜩한 게 있다. 가상의 극본도 아니고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도 아니다.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와 자극하고, 마음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살아나가게 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예고 없이 달라지는 것이다. < 세일즈맨 >은 이 끔찍한 '일상' 속 딜레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로 가족, 계급, 종교 등 인간의 삶을 층층이 펼쳐놓은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또다시 삶 속을 조명한다. 저명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극본을 이란 테헤란으로 옮겨온 영화는 실제로 극을 준비하는 한 부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닥쳐온 어떤 사건을 통해 연극은 일상이 되고 일상은 연극처럼 변해간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딜레마와 사회적 편견, 상처와 공감, 해결의 방식이 한 데 섞여 결말은 파국으로 치닫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세일즈맨의 죽음보다 심오한 고뇌를 안겨주고야 만다.




벽에 금이 가고 창문이 깨지며 무너지는 건물에서 탈출하는 사람들로부터 영화는 거대한 단절, 혹은 무너짐을 암시한다. 살 곳을 잃은 부부 에마드와 라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그의 친구 바박의 소개로 새로 지낼 곳을 찾는다. 평온하고 또 편안한 삶은 무심결에 문을 열어놨던 라나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면서 자그마한 균열이 인다.


알고 보니 그 집에 먼저 살던 세입자는 창녀로 소문이 자자했다. 범인을 찾고자 하는 에마드지만 샤워 중 끔찍한 일을 당한 라나는 그 날의 기억을 다시 꺼내기를 주저한다. 이웃 주민들의 수군거림과 부상 입은 아내, 미리 알지 못했던 세입자의 존재가 겹치면서 에마드의 심리는 점점 협소해진다. 어느새 아내를 해친 범인을 찾는 일은 아내를 위한 행동이 아니게 된다. 미리 찜찜한 부분을 알려주지 않은 바박, 그럼에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아내, 가르치는 학생들의 태도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잔잔하게 일상 곳곳을 들여다보면서도 은근한 심리적 압박을 불어넣는다. 그 압박이란 건 압도적인 이미지, 과격한 감정 변화에서 오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TV 일상극을 볼 때 느끼게 되는 부분과 같다. 나 자신조차 민망해질 정도의 감정 변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불안감. 사실 이런 감정은 그리 크지 않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 대단하진 않으나, 감정의 파고를 실제로 겪게 되면 그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조곤조곤하고 상냥한 교사였던 에마드가 날카롭게 학생들을 대하게 되는 장면이나, 라나의 부상 이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연극과 더불어 연기 중 대사에 있지도 않은 욕설을 바박에게 퍼붓는 모습은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날카로워지는 사회 속 우리의 모습이 겹쳐 더욱 섬뜩해진다. 




결국 용의자의 픽업트럭을 추적해 그를 무너지는 아파트로 불러낸 에마드는 앞서 언급한 곤혹,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실 여기서부턴 용서를 해도 하는 게 아니다. 이미 라나가 받은 상처와 심리적 고통, 에마드가 처한 난처함과 그 속에서의 심리적 압박, 그 모든 게 범인을 용서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찾아낸 범인은 그가 연극하며 애착을 갖는 주인공과 꼭 닮았다. 무얼 파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직함 하나로 일하는, 먹여 살릴 가족 앞에서 자꾸만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세일즈맨, 그리고 그 가족들. 그토록 찾던 범인 이건만 에마드는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세일즈맨 >은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친 라나를 두고 사람들은 여자라서, 문을 함부로 열어서, 전에 살던 세입자가 창녀라서, 남자를 끌어들여서라는 등 온갖 말을 쏟아놓는다. 며칠도 안 되어 불안해하는 라나는 불편하고 투정 부리는 아내가 된다. 사소한 사건 하나로 어디를 가든, 어떤 말을 하든 불안해지는 마음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당국의 검열, 경찰에 대한 불신, 모든 것이 한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현실 '세일즈맨의 죽음'이 된다. 이 사회, 이 도시, 이 공간, 이 집단이 거대한 무대가 된다.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삶이라는 극 중 한 사건, 하나의 테이크가 끝난 부부는 허무한 표정으로 분장을 받는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산다는 게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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