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14. 능력의 탄생
배정환
저가 시장에 밀리고, 대형 프랜차이즈에 치이며 살아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하던대로 하다가는 얼마가지 못 할 거라는 위기의식이 찾아왔다. 변화만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태성은 새로 나온 책을 비치하자는 딸의 아이디어가 고객 유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책을 읽는 손님이 부쩍 많아졌다. 혼자 와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늘었다. 카페 이미지도 한결 좋아져서 아이들과 함께 오는 분들도 생겼다. 딸은 간단하게 책의 내용과 느낀 점, 추천 이유를 프린트해서 책장 옆에 붙였다. 많지 않은 책이지만, 자기 계발, 에세이, 최근 유행하는 소설, 인문학 책들을 구비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은 두 권을 준비했다. 수민이는 책장 옆에 또 다른 프린트를 하나 붙였다. '책을 읽고 짧은 줄거리와 소감, 추천 포인트를 적어주시면 아메리카노를 한잔 드립니다.' 그 밑에 메모지와 볼펜을 두었다. 어떤 손님은 기꺼이 글을 적어두었다. 수민이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고객의 추천이유를 프린트해서 붙여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천된 책과 추천사가 쌓여가며 하나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스티커 종이에 자기만의 느낌을 적어 붙여두는 손님이 있었다. 테이블마다 책이 두세 권씩 쌓였고, 책마다 서평 아닌 서평들이 붙기 시작했다. 수민이는 책장 옆에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붙였다. 손님들이 써준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더니 어떤 손님은 한참 서서 그 글을 읽기도 했다. 어느새 카페 분위기는 북카페의 모양새가 되었다. 책에 관해서는 수민이에게 모두 일임했다. 태성은 의견만 낼뿐 모든 것을 딸에게 위임했다. 회사에서도 배운 대로 일단 위임을 하면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책에 관해서는 수민이와 도성이 태성보다 한수 위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성도 나서서 수민이를 도왔다.
공부보다 유난히 책만 좋아했던 딸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카페 매출에 도움이 될 줄 몰랐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아진 반면 문제점도 생겨났다. 책을 읽다 보니 테이블 회전율이 떨어졌다. 다음에는 쇼윈도 앞에 1인 테이블을 둘러 인테리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성이 책을 읽으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 딸 수민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몰려 들어왔다.
"아빠 우리 저 긴 테이블에서 독서 토론하려고 해요. 괜찮죠?"
"그래? 그래 그럼."
딸은 친구들을 향해 외쳤다.
"자. 일 인당 주문 하나 필수! 알지?"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OK 사인을 손으로 그렸다. 딸은 친구들과 돌아가며 지난주에 같이 읽었던 책에 관한 소감을 발표했다. 카운터에서 바라보니 웃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한 딸의 얼굴이 사뭇 엄마를 많이 닮았음을 떠올렸다. 활발하고 진취적인 성격까지 대물림되는가 보다. 아빠를 닮지 않아 다행이지만, 엄마와 비슷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태성은 수민의 제안대로 입구와 카운터에 광고를 하나 붙였다.
[카페에서 독서토론을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을 읽고 자유롭게 토론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여하세요. 0000년 0월 0일 저녁 7:00. 참여비는 커피 주문]
"아저씨 이거 아무나 참여해도 되나요?"
주문을 하던 여자 한 분이 질문을 던져왔다.
"네. 어떤 분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진행해요? 아저씨가 하시나요?"
"아니요. 우리 딸이 책을 좋아하는데요. 저 책으로 무료 토론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여자 손님은 재미있겠다며 딸이 준비해 둔 용지에 이름을 적었다.
토론하는 날, 수민이 친구들 외에 4명의 손님이 추가되어 8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참여자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수민이는 아빠가 생각하던 어리광 부리던 딸이 아니었다. 먼 테이블 손님도 궁금한 표정으로 토론을 한참 바라봤다. 참여하신 분이 나가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따님이 엄청 야무지네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학생 같지 않아요."
"아. 그런가요. 자주 찾아주세요. 독서토론 자주 할 겁니다. 다음에는 경제책으로 하려고 합니다."
손님은 긍정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히고 돌아갔다. 태성은 경제책을 하나 집어 들고 열심히 읽고 요약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독서토론 날짜를 잡아 공지했다. 태성과 수민은 돌아가며 문학과 경제책을 리드했다. 카페는 조금씩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
딸이 또 제안을 해왔다.
"아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하세요."
"아빠는 그런 거 못해."
"못하는 게 어디 있어요. 저도 도울 테니 일단 시작해 보세요. 카페 홍보하지 말고 책과 토론만 홍보하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홍보하면 사람들이 실망해요. 일단 내가 만들 테니까 관리는 아빠가 하세요."
태성은 내 딸이 맞는가 싶었다. 어느 누구보다 든든한 파트너를 얻었구나. 일단 블로그를 개설하고 카페 이름 뒤에 "지기"라는 이름을 붙여 별명을 만들었다. 시간 나는 대로 책 읽은 것도 올리고 토론하는 분들에게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4번의 독서토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카페인지 도서관인지 분간이 안되었다.
태성은 어느덧 카페 사장이자 독서토론 리더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 나면 서점을 자주 찾아갔고 다른 독서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진행해서 그런지 참여하는 고정 인원이 40명으로 늘었고 이제는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모임의 숫자도 생겨났다. 낮에는 주부들이 모였고, 밤에는 직장인이 모였다.
태성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저희 지인들이 모여 연말 행사를 하고 싶은데요. 혹시 카페 대여도 되나요?"
"대여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뭐 하시려고 하세요?"
"아... 친구들과 작은 콘서트를 열어볼 예정인데요. 10명 정도 모여서 아마추어 공연을 열어보려고요."
수민이가 옆에 있다가 태성에게 아이디어가 있다며 귓속말을 걸었다. 수민이의 아이디어대로 대답했다.
"손님, 혹시 그 공연 카페 주최로 하고 손님이 공연하시면 안 되나요? 저희 손님도 초대하고요."
"저희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아마추어라서 저희 아는 분들과 오붓하게 공연하려고 했는데요."
"그럼 아마추어 공연으로 하죠. 저희 토론하는 분들 모아서 같이해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카페는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연말 행사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카페 내부는 나름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디지털 피아노와 기타로만 이루어진 오붓한 공연이었지만 사람들은 무척이나 만족해했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은 음악의 날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카페가 문화공간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용기가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다른 카페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생겼다.